[사설]국정원 예산, 철저한 검증 먼저

  • 입력 2001년 12월 4일 18시 46분


엊그제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여야 의원들이 국가정보원 예산 삭감을 놓고 공방을 벌였다. 야당이 국정원의 활동비 내용 공개 및 예산 삭감을 주장하고 나선 데 대해 여당은 ‘내년 대선에 앞서 국가 공권력을 무력화하려는 전략’이라며 반발했다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이 같은 논의의 순서가 뒤바뀌었음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야가 국정원 예산의 증감 여부를 놓고 정치싸움을 벌이기에 앞서 정보예산이 적절하게 사용됐는지를 따져보기 위한 검증장치를 강화하는 것이 논의돼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요즘 상황을 보면 야당쪽 주장에도 수긍이 가는 대목이 있다. 최근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각종 ‘게이트’에 국정원 간부들이 연루돼 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터에 차라리 국정원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힘을 얻을 만하다.

국정원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이래로 수 차례 내부 개혁을 단행해 왔지만, 잊을 만하면 정보기관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 행태를 보여온 게 사실이다. 그런 ‘업보’가 쌓이고 쌓여 이번에 예산삭감 공방까지 나오게 됐음을 국정원 측은 대오각성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헌정사상 정보 예산을 삭감한 전례가 없고, 각국 정보기관들은 오히려 예산을 증액하는 추세’라는 여당측 반박은 국정원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고 있을 때에나 할 말이다.

문제의 핵심은 정보 예산에 대한 검증 수단의 강화다. 국정원(옛 안기부) 예산은 1994년 국회에 신설된 정보위에서 비공개로 심사하도록 돼 있지만, 그동안 정보위가 얼마나 치밀하게 국정원 예산 및 활동을 검증해 왔는지는 의문이다. 국정원법에 의하면 국정원은 산출 내용과 첨부서류를 생략한 채 총액 개념으로 예산안을 제출할 수 있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느슨한 검증 체계에 더해 특수한 정보업무를 제대로 따질 능력조차 못 갖춘 정보위의 원천적 한계가 국정원의 일탈을 방조한 결과를 가져온 게 아닌가.

국가정보기관의 생명은 신뢰에 있다. 세계의 대다수 정보기관들이 예산을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 것이나 비밀활동을 묵인해 주는 것도 그들이 국가안보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국민적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정보기관이 제 할 일만 충실하게 하고 있다면 오히려 예산을 늘려야겠다는 요청에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우리 국정원은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실패했다. 정치권은 정보예산 삭감을 놓고 공방을 벌이기 전에 신뢰의 발판이 될 정보예산 검증 체계부터 강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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