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화제도서]근대이전 日 여성의 존재는? '여자의 민속지'

  • 입력 2001년 11월 23일 18시 44분


◆ 도쿄에서

◇‘여자의 민속지(民俗誌)’/미야모토 츠네이치(宮本常一) 지음 이와나미

일본의 '민속학'은 메이지 시대 이후 근대화의 파도가 밀려 올 때 꺼져 가는 민중의 생활을 기록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로 태어난 것이다. 그것은 잊혀져 가는 시대에 대한 향수와 아쉬움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근대사회에 대한 많은 왜곡과 억압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했다.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男)는 민속학계의 거두로서 일본 민속학의 아버지로 추앙 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직접 현장에 나가 조사를 한 일은 거의 없고, 제자와 신봉자들이 보내 준 정보로 '야나기다 민속학'을 구축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야나기다와는 정반대의 태도로 일관해 온 민속학자가 바로 미야모토 쓰네이치(宮本常一1907-1981)이다. 그는 일본 각지를 돌아 다니며, 민중의 생활을 직접 보고, 듣고, 기록했다. 심지어 그는 일 년에 이백일 이상을 민속조사 여행을 나갈 정도였다. 엘리트 냄새가 물씬 나는 야나기다와는 달리, 미야모토는 한없이 '민중적'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는 쉽게 민중 속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그는 조사 여행 중에 만난 농민이나 어부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그 결과 그들과 곧 친해져, 그들의 집에 머물면서 동네 어른들로부터 옛날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야기를 기록했다. '필드워크'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소박한 미야모토식의 연구 방법이었다. 이렇게 해서 '잊혀진 일본인'을 비롯한 60권이 넘는 명저가 탄생했다.

이 번에 소개하는 '여자의 민속지'는 일본 사회를 저변에서 떠받치고 있었던 여성들의 삶을 애정 어린 필치로 써 내려간 글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여성들이 물질적인 생활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생활에도 대단히 적극적이었다고 하는 내용은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끈다. 농촌에서 모내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여성이었으며, 어촌에서 바다에 들어가 해산물을 딸 수 있었던 것도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고대 모계 사회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지방에서는, 남편에게 불만이 있는 경우에는 여자 쪽에서 이혼을 요구해 아이들과 함께 친정으로 가 버리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또한 불교가 일본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민중들의 신앙 생활의 중심도 여성이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여성만이 신(神)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집안에만 틀어 박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도시에 있는 사무라이 집이나 큰 상가(商家)에 일하러 나가 도시의 습관을 농촌에 전했던 것도 여성들이었다. 특히 어촌에서는 먼 길을 떠나 행상을 해 쌀을 사 왔던 것도 여성이었다. 그리고 농촌이나 어촌에서 여성이 데릴사위를 얻어 집안을 이어가는 경우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여성들이 농촌의 일뿐만 아니라 상업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전통적인 일본 사회에서는 여성이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게 생각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서양에서 여성해방사상이 전해지기까지 일본의 여성들이 오직 인내와 복종의 생활을 감수하고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가슴에 품었던 갖가지 상념과 감정들은 역사의 기록에는 남겨지지 않은 채 잊혀져 갔다. 이런 사실들을 미야모토는 어떻게 해서든지 글로 남겨, 많은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즉, 미야모토는 남존여비의 이데올로기에 굴하지 않고 단단한 자기 신념을 가지고 묵묵하게 생활을 해 온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물론 과거에 대한 향수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러한 여성들의 노력을 여성의 자립을 향한 해방의 역사로 보고자 했던 미야모토의 태도는 이것을 말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민속학은, 자칫하면, 근대 이전의 사회를 이상향처럼 그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그러한 측면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는 점도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미야모토는 패전 후 일본의 여성운동을 전면적으로 지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정으로 남자들의 특권을 박탈당하지 않으려면, 전쟁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연숙(히토쓰바시대 교수·언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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