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남찬순]김대중대통령의 약속

  • 입력 2001년 11월 23일 18시 30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나 당내 정치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초연한 태도를 취하겠다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다짐은 일단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김 대통령이 전념하겠다는 3대과업(경제의 경쟁력 강화, 민생의 안정, 남북관계 개선)이나 내년의 4대 행사(월드컵축구대회, 부산아시아경기 및 아태장애인경기대회, 지방선거, 대통령선거)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정치 不개입’ 지킬지 관심▼

김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면서 한 그 같은 다짐은 바로 국민에게 한 ‘약속’이나 다름없다. 그 ‘약속’이 지켜진다면 김 대통령은 유종의 미를 거둔 대통령이 되고 “정권에는 임기가 있지만 국가에는 임기가 없다”는 그의 말은 오랜 기간 감동을 주며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약속’에 관한 한 김 대통령은 그렇게 돈독한 국민의 신뢰를 쌓지 못했다. 여기에는 물론 그에 대한 정치적 음모와 공세 그리고 지역색을 띤 편견도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불신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바로 그의 정치적 처세였다. 구태여 그 정치행적을 다시 꺼낼 필요는 없겠다. 그럼에도 거론하는 이유는 이번 ‘약속’도 여전히 못 믿겠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이 정말 ‘약속을 지킬까’ 또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약속을 지킬까’라는 질문은 본인의 의지나 결단 용기를 염두에 둔 말이고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정치적 환경이나 주변상황에 초점을 맞춘 말이다. 우리는 정치환경이나 주변상황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는 정치지도자의 변명을 수없이 들어왔다. 그래서 이번에도 정치환경이나 주변상황이 어떻게 발전할지 주시하며 김 대통령의 진심을 거듭 묻게 되는 것이다.

김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 정권에 대한 미련과 유혹을 과감히 뿌리쳐야 한다. 권력의 고삐를 쥐고 정치를 주도하는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라 민생에만 전념하는 ‘행정적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지금까지 맺어온 모든 정치적 인연을 끊고 여야를 초월하는 국정의 중재자, 조정자의 길로 들어서야 할 것이다. 당장은 힘들고 허전한 길이겠지만 그 길로 가야 ‘약속’을 지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어떤가. 누구보다 험한 정치인의 길을 걸어 권력의 정상에 선 사람이 아직도 1년여 임기가 남은 지금 그렇게 쉽게 마음을 비울 수 있을까. 사라져 가는 권력의 뒷모습을 초연하게 바라보며 아무런 아쉬움 없이 빈손을 훌훌 털 수 있을까. 김 대통령의 정치적 집념과 권력에 대한 집착은 남다른 데가 있다. 생각을 바꾸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김 대통령을 둘러싼 정치 환경이나 주변 상황도 김 대통령을 자유롭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당 내부의 이른바 김심(金心)을 얻기 위한 충성 경쟁은 김 대통령이 당 총재직을 떠나기 전이나 떠난 후나 조금도 변함이 없다. 그 중에는 당에서 DJ의 색깔을 확실히 빼자는 사람도 있고 DJ를 딛고 넘어설 방안을 강구하자는 사람도 있지만, 김심을 얻지 않으면 될 일이 없다는 사실은 동교동계도 쇄신파도 중도개혁파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마음 비우고 민생 전념을▼

아무리 “정치로부터 초연하게 국사를 운영하겠다”해도 김심을 끌어들이려는 당내 각 파벌의 자력(磁力)과 김 대통령의 본원적인 권력의지는 결국 김 대통령을 초연하게 앉아 있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총재직은 떠났지만 곧 수렴청정을 하게 될 것이라는 추측이 그래서 나온다.

여기에다 한나라당은 계속 김 대통령의 심기를 자극할 것이다. 벌써부터 김 대통령이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개혁정책들이 갈팡질팡하고 있다. 대선과 지방선거는 여야관계를 ‘죽기 살기’식의 제로섬게임으로 몰고 갈 것이 뻔하다. 그럴 경우 김 대통령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솔직히 말해 김 대통령은 지방선거와 대권경쟁이 본격적으로 불붙게 되면 다시 정치 현장에 모습을 나타낼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런 시나리오가 된다면 애당초 국민에게 한 ‘약속’은 또 한번의 거짓말이 된다.

김 대통령이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이처럼 좁고 험난하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 길을 헤쳐나가는 김 대통령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남찬순<논설위원>chans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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