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칼럼]이치로의 입

  • 입력 2001년 11월 22일 10시 51분


스즈키 이치로가 아메리칸 리그 MVP에 등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일전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깨서 이를 가는 우리가, 유독 이치로의 MVP 수상 소식엔 왠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통쾌하고 뿌듯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필자 만의 망상인가?

이치로가 올 시즌 초 메이저에 입성 했을 때 소위 '메이저 리그' 전문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일본 리그 타격왕을 일곱번이나 한 이치로도 '메이저의 벽' 앞엔 무릎을 꿇을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 부정적인 시각은 시즌 중반까지도 계속되었다. '장기 레이스에 결국 체력이 딸려서 후반엔 깨갱 할거야' 예상이란 빗나가기 위해 존재한다고도 하지만 세상에… 어쩜 빗나가도 이 정도로…

메이저 리그 로스터에 오른 것 만으로도 스포츠 신문 기사거리가 되는 국내 야구 현실에 비하면 이치로의 MVP 수상은 입이 쫘악 벌어진다고나 할까? 이 '사건'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대단한 일인지에 대해선 앞으로 여러 매체에서 집중 분석하겠지만, 이치로는 실제 그의 루키 시즌 한해 동안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활약을 보였다. 기계처럼 정확히 휘둘러 지는 그의 방망이질로, 번개같이 재빠른 그의 발로, 레이저 광선처럼 힘 실린 그의 어깨로…

언젠가 한일 슈퍼 게임을 TV로 봤을 때 이치로란 곱상한 인상의 청년을 처음 보게 되었다. '일본의 토니 그윈', '이치로의 시계추 타법'하며 이치로의 밀도 높은 타력에 온 언론이 경악하기도 했었고, 필자 역시 그의 플레이에 매료되었었다. 어디 하나 흠 잡을 곳이 없는 선수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지난 몇 년간 시애틀 매리너스 스프링 캠프에 합류해서 훈련한다는 소식을 듣고 언젠가는 메이저 리그 입성을 기대했지만, 과연 그 호리호리한 몸매에서 '시계추 타법' 아니라 그 할아버지라도 과연 '알만도 베니테즈의 화염병'을 받아칠 수 있을 지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이치로가 물리친 MVP 경쟁자들 - 제이슨 지암비, 브랫 분, 알렉스 로드리게스, 후안 곤잘레스... 사실 이 점이 더 실감이 나질 않게 만든다. 이치로가 잘 한 건 사실이지만 메이저 리그 최고봉인 이들 보다 더? 분명 쇼크다. 하지만, 이치로의 MVP 등극을 보며 메이저 리그에도 '정의는 살아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국만리에 와서 온갖 문화적 언어적 차이를 극복하고 이치로의 올해 성적만큼 낸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메이저 리그 언론인들이 인정했다는 사실은 '희망은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또 한편으로는 마크 맥과이어가 은퇴를 선언하고 로저 클레멘스, 배리 본즈, 랜디 존슨과 같은 '공룡'들이 앞으로 길어야 2-3년 후 '줄 은퇴'를 선언할 것을 감안한다면 메이저 리그엔 분명 신선하고 상품 가치가 있는 '새로운 별'이 필요했다고 보여진다. 그들 눈에 이치로의 플레이 스타일만큼 또 신선하고 exciting한 야구가 또 어디 있을까? 3루쪽으로 떼굴떼굴 굴러가는 내야 안타 만들어서 가볍게 2루 훔치고 진루타로 3루 가고 큼직한 외야 플레이로 득점… 가장 '비 미국적 야구'이긴 하지만, 신선함에 있어서 만큼은 '30홈런 100타점 슬러거'의 곱절은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스타는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보고 조만간 또 '이승엽도 희망 있다', ''메이저 벽이 보인다'… 온갖 추측이 난무하겠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이치로의 최대 무기이자 매력은 그의 방망이도 발도 어깨도 아닌 바로 이치로의 입이다. 어지간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 그의 포커 페이스… TV로 시청하는 우리가 봐도 "쟤는 뭐가 그리 잘나서 동료들과 하이 파이브도 한번 제대로 안 한다냐?'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차분하고 과묵하고 집중되어 있는 동양인 이치로의 모습에서 미국인들은 점차 묘한 매력을 느낀 것 같다.

일본 리그 타격왕 7회, MVP 3회 -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그의 이력서에 대해 그는 내 놓고 떠들어 본 적이 없다. 덕아웃에서 그의 입은 닫혀 있었지만 그에게 필요한 모든 '토킹 어바웃(talking about)'은 철저히 그라운드에서 플레이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백번 떠들고 오바하면 뭐 하겠냐? 한번 보여주마' 이런 의미가 숨어있었던 것일까? 화려한 전적을 뒤로 하고 철저한 루키의 마음 자세로 돌아가 야구에만 집중하고 야구로써 호소했던 이치로의 모습을 보고 텃세 세고 장난기 넘치기로 유명한 메이저 리거들도 하나 둘씩 그에게 존경의 시선을 보냈다. 동료들의 믿음과 존경을 얻는 순간 메이저 리그 진출 성공의 반은 이룬 셈이다.

이치로의 MVP 수상은 한일 감정을 떠나서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우리에게도 분명 희망적인 메세지를 전달하긴 하지만, 희망과 흥분에 들뜨기에 앞서 이치로가 선택했던 '성공 방정식'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이승엽도 최희섭도 보증수표는 될 수 없다. 필자가 그토록 흠모했던 '야구 천재' 이종범의 국내 복귀를 지켜 보며, 그리고 이치로의 MVP 등극을 지켜보며 '야구 말고 그 무엇'을 찾고 극복해 나가는 일이 어쩌면 일본 야구의 폭포수 커브를 치는 것 보다, 그리고 베니테즈의 화염병 속구를 받아 치는 일 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자료제공: 후추닷컴

http://www.hooc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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