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마당]박재완/‘하이닉스 처리’ 국익이 먼저다

  • 입력 2001년 10월 19일 18시 32분


식당에서 손님이 주인에게 메뉴를 묻자 주인은 설렁탕과 매운탕을 준비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손님은 곰곰이 생각한 뒤 설렁탕을 주문했다. 잠시 후 주인이 깜빡 잊었다는 듯이 비빔밥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손님은 설렁탕을 취소하고 매운탕을 시켰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케네스 애로가 지적했듯이 ‘일단 선택한 것과 전혀 관련 없는 대안에 의해서 결정이 뒤바뀌는’ 사례이다.

‘무관한 대안’이 ‘환상’을 불러일으켜 선택을 왜곡하는 사례는 의외로 많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3선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면서 개헌안과 직접 관련이 없는 ‘국민의 신임’을 함께 물었다. 65% 찬성으로 개헌안은 통과됐는데, ‘무관한 대안’이 없었더라면 반대의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한국경제에서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계륵(鷄肋)’으로 부상한 하이닉스반도체의 처리에도 이와 비슷한 ‘환상’이 개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이닉스는 8조원이 넘는 부채 때문에 출자전환과 채무상환 유예 등 지원에도 불구하고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으며 회생가능성은 불투명하다.

세계 최대의 D램 생산능력과 3위의 시장점유율을 보유한 하이닉스가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운명에 처한 요인은 두 가지다. 하이닉스는 반도체 제조업체 중 유일하게 차입금이 매출액보다 많아 금융비용이 많다. 따라서 투자여력이 없다. 지난해 말부터 폭락해 생산비용에도 미치지 못하는 반도체값도 큰 요인이다.

하이닉스 처리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부도 처리에 이어 법정관리나 청산의 수순을 밟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쟁력이 없는 생산라인을 매각 내지 폐기하는 등 뼈아픈 구조조정과 과감한 금융지원을 통해 기사회생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전자(前者)는 외부지원으로 회사를 연명시키면 증시와 대외신인도에 부정적 영향을 주며, 금융시장의 원칙을 깨뜨리는 선례가 될 것을 경계한다. 추가지원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의 추가부실로 이어질 가능성도 우려한다. 후자(後者)는 하이닉스의 국민경제적 비중이 막대하고, 몇 년만 버티면 4년 주기로 돌아간다는 ‘실리콘 사이클’에 의해 다시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한다.

쉬운 결정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반도체 경기 회복이 V자형일지, L자형일지 전망이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궁극적인 선택은 하이닉스의 회생 가능성과 국익에 입각해야 한다. 채권단은 회생 가능성을, 정부는 국익을 각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채권단이 ‘이미 쏟아 부은 돈이 얼마인데’라며 매몰비용에 집착하거나, 정부가 빅딜 실패에 대한 추궁을 회피하기 위해 ‘무관한 대안’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최근 하이닉스 채권단은 채무상환을 유예하되 신규 지원은 보류하는 엉거주춤한 결정을 내렸다. 핵심기술의 유출을 감내하면서까지 경쟁상대인 중국에 생산설비 매각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도 한다. 시간 벌기나 체면치레 목적의 ‘무관한 대안’이 힘을 얻는 징후가 아닌지 걱정된다. 무관한 대안에 영향 받지 않는,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박 재 완(성균관대 교수·행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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