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테러의 ‘또 다른 피해자들’

  • 입력 2001년 9월 21일 18시 26분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가 영화의 한 장면 같은 테러공격으로 참혹하게 주저앉은 지 일주일쯤 지난 날 국내 한 TV방송은 ‘또 다른 피해자들’이란 제목의 뉴스를 내보냈다. 서울 용산 미군기지의 검문검색으로 차량이 밀려 시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내용인데 화면에 등장한 버스운전사와 승객은 왜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 때문에 우리가 이 고생을 겪어야 하느냐, 우리국민 전체를 테러범으로 보는 것 아니냐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이번 테러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든지 그건 개인의 자유다. 미국이 한국전에서 얼마나 많은 인명을 희생했고 휴전 후 먹고살기 힘든 우리 국민에게 얼마나 많은 식량을 원조해 주었으며 망가진 한국의 전쟁복구를 위해 무엇을 도왔는지는 관계없다. 미국이 얼마나 많은 한국인을 이민으로 받아들였는지, 또 얼마나 많은 수출품을 사줘서 우리 경제를 결정적으로 부흥케 했는지를 일깨울 필요도 없다.

▼슬그머니 재정지출 확대 시도▼

단지 이웃이 5000명 넘게 가족을 잃는 참화를 당했을 때 손가락에 가시 박힌 정도의 아픔은 참아줄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 뉴스를 잘 내보내는 방송사는 요즘, 우연인지 모르지만 뉴스 시청률 저하로 고전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말이 나온 김에 피해를 따지자면 과연 이번 테러의 ‘또 다른 피해자’가 그들뿐일까. 안된 얘기지만 지금부터 정부가 테러사태를 빙자해 실시하려는 경제정책을 국민이 제대로 감시하지 않으면 진짜 심각한 피해자는 우리 다음 세대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얼마 전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국가부채로 인한 재정파탄을 걱정하면서 만든 대외비보고서가 그럴 가능성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10년 뒤 우리나라의 국가부채는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더라도 400조원에서 최대 693조원에 달한다.

나라빚이 많아지면 일어날 일은 뻔하다. 예를 들어 정부가 균형재정을 약속한 2003년의 국가부채는 190조원을 넘을 것으로 계산되는데 이때 내야 할 이자는 현재의 낮은 금리가 유지된다 해도 무려 10조원에 달한다. 물론 빚은 그대로 둔 상태에서 말이다. 국가예산이 100조원 남짓인데 이자만 10조원을 낸다면 나라살림은 어떻게 될까. 재정이 궁핍해 경제투자를 못하면 세금이 덜 걷혀 정부는 또 빚을 얻어 재정을 짜야 한다. 부족한 돈을 한국은행이 찍어낼 때 발생할 인플레는 당장 국민생활을 척박하게 만들고 금리가 올라 이자부담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악순환을 일으킨다.

건전 재정의 둑이 한번 무너지면 좀체 막기 어렵다는 고약한 특성을 선진국들의 경우가 역사를 통해 예외 없이 입증했다. 미국이 적자재정을 30년 만에 겨우 흑자로 되돌려 놓았지만 그것도 세계 경제사에 유례 없는 8년 연속 호황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일본이 과거 재정으로 경기를 일으키다가 지금 낭패를 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판에 우리 정부는 테러사태를 명분으로 ‘재정악화를 각오하더라도 인위적 경기부양책을 검토하겠다’는 식의 말을 흘리기 시작했다. 불과 두달 전까지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은 일관되게 “재정지출을 통한 경기부양은 그 부작용이 워낙 심하기 때문에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경제수장조차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이 그의 생각을 변화시켰단 말인지 궁금하다.

▼다음 세대의 고통엔 관심없나▼

국민기초생활보장 추곡수매가 인상, 그리고 모성보호법과 주 5일 근무 등 명분 좋은 정부의 정책은 반드시 우리 후세가 지출해야 할 대규모 부담을 전제로 한다. 경제에 공짜점심이 없다는 말은 국민이 작은 당근에 홀려 훗날 풀뿌리를 먹어야 할 고통을 일깨워준다. 그렇다고 돈 쓸 줄만 알지 재정부실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국회의원들이 그걸 지켜주리라 기대할 수도 없다. 옛날 예산을 담당하던 젊은 관리들은 통일비용을 위해 균형재정을 지켜야 한다며 정치권의 지출확대 압력을 거부하던 열정이라도 있었지만 분위기상 지금은 그것마저 힘겨워 보인다.

내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부가 환심성 지출을 확대하고 싶을 때 테러사태가 일어났다. 그 결과 다음 정권은 불행하게도 외환위기를 선물로 받았던 현정권보다 더 열악한 경제상태를 인계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우리 다음 세대를 ‘또 다른 피해자’로 만드는 끔찍한 일이 예고되고 있는 것이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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