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이래서 명작] 프리드리히 폰 실러 '군도'

  • 입력 2001년 9월 13일 15시 59분


◇ 억압적 교육 속에 불태워온 문학에의 열정

실러는 비텐베르크의 소도시 마르바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박봉의 군의관이어서 생활이 늘 어려웠다. 아버지는 4남매중 외동아들인 실러에게 큰 기대를 걸었으나 어려운 형편에 그를 교육시키기가 어려웠다. 고등교육을 포기하고 목사가 되려고 하던 중 비텐베르크의 영주인 카를 오이겐의 눈에 들게 된다.

오이겐 공작은 폭군형 영주로서 그 도시에서 절대적인 지배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교육사업의 일환으로 카를 고등학교를 세워 도시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학교는 극단적인 엄격한 군대식 훈련과 거의 노예나 다름없는 주입식 교육을 시행했다. 전공도 학생들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주가 결정해 주었다. 실러도 영주의 명령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게 된다. 문학을 좋아하던 실러는 무미건조한 법학에 흥미를 가질 수 없어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자, 간신히 허가를 받아 의학부로 옮기게 된다. 이렇게 청년 실러는 7년간 절대 복종만을 강요하는 이 학교에서 보냈다.

그러나 이런 억압 속에서 그는 불굴의 반항정신을 고취시켰고, 문학서적을 전혀 읽지 못하게 하는 엄격한 감시가 오히려 문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게 했다. 이 시기에 그는 셰익스피어, 레싱, 괴테, 루소 등 여러 작품들을 몰래 읽었으며, 〈군도〉를 집필했다. 극비리에 씌어진 이 작품은 학교를 졸업한 다음해인 1781년에 자비로 출판했다. 아무도 무명작가의 작품을 출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했던 이 작품은 나오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고, 독일 전 지역에서 무대에 올려지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프란츠'의 모습은 오이겐공을 빗대어 비판한 것인데도, 오이겐공의 영지인 슈투트가르트시에서 몇 번이고 상연되어 인기를 끌었다. 오이겐공은 이 작품이 자신을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자신의 지역에서 유명한 인물이 나왔다는 것에만 기뻐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곧 오이겐 공에게 알려졌고, 거기다 실러가 자신의 허락 없이 지역을 무단 이탈하여 만하임으로 연극을 보러 가자 분노하여 실러에게 처벌이 내려졌다. 2주일간의 감옥생활과, 자신의 지역밖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일체의 문학활동을 금한다는 내용이었다.

실러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각오를 하고 두 번째 작품인 〈피에스코의 반란 Die Verschworung des Fiesko zu Genua〉을 들고 만하임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기대를 걸고 갔던 만하임 극장측에서 오이겐공의 보복이 두려워 실러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의 고된 방랑의 길이 시작됐다. 그는 오이겐공의 체포를 피해 프랑크푸르트, 마이닝겐 등의 지역을 차비도 없이 떠돌아 다녔다. 〈군도〉가 독일뿐 아니라 프랑스 파리에서까지 상연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었음에도, 그는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는 궁핍한 방랑생활을 해야만 했다.

◇ 가난과의 투쟁 속에 이어온 실러 문학의 생명

그러다 1783년 만하임 극장에서 1년간 전속작가가 돼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곳에서 <간계와 사랑 Kabale und Liebe>, <피에스코의 반란>을 상연하고 <돈 카를로스 Don Carlos>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곳

에서 상연된 연극으로 그는 천재적 작가로 불리며 명성을 쌓았으나, 실생활은 보잘 것 없는 수입과, 과로로 얻은 결핵으로 고단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병이 악화되자 극장은 계약을 파기해 버렸다. 실러는 부채에 쪼들렸으며, 사랑하는 여인과 이별도 겪어야했다. 그러나 실러는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잡지 <타리아>를 발행하여 시대의 비판적 글과 연극이론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잡지도 경제적 문제 때문에 폐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실러 자신도 만난 적이 없는 쾨르너의 도움을 받는다. 그는 실러의 팬이었다. 실러가 쾨르너의 집에 머문 2년의 시간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편안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가장 큰 소득은 <돈 카를로스 Don Carlos> 를 완성한 것이었다.

그후 괴테의 추천으로 예나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지만 이름이 교수지 봉급은 거의 없었다.

"이 교수직을 악마가 가져갔으면, 그 사람들은 나의 주머니에서 금화를 한 개 한 개 빼내가고 있어요. 부채가 나의 생활을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요."

실러가 친구인 쾨르너에게 고통 속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실러는 그 고통 속에서도 희곡은 물론, 역사와 철학에 대한 연구, 미학과 문학의 비평 등 지속적인 문학 활동을 해나갔다. 그러다 46세에 지병(결핵)으로 사망했다.

실러의 인생은 가난과 질병과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도 그는 한번도 붓을 꺾지 않았다. 이 투쟁정신이야말로 실러 문학의 생명이었던 것이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프랑켄 주의 영주인 몰 백작에게 한 통의 편지가 온다. 몰 백작이 그토록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큰아들 카를의 소식이 담긴 편지다. 그러나 그 편지에는 카를이 도박을 일삼고, 여자를 강간했으며, 살인까지 저질러 쫓기는 몸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몰 백작은 가문을 빛내리라 믿었던 큰아들의 소식에 충격을 받는다.

그때 둘째 아들 프란츠가 형을 영원히 내쫓는 편지를 써보내라고 아버지를 유혹한다. 몰 백작은 그래도 카를을 내칠 수가 없어 망설이지만, 그래야 카를이 마음을 바로잡고 진실한 사람이 될 거라는 프란츠의 강한 설득에 넘어가고 만다. 몰 백작은 직접 편지를 쓰려하지만, 프란츠가 말린다. 몰은 프란츠가 대신 편지를 쓰는 것을 허락하고는 슬픔에 잠겨 방을 나간다. 아버지가 나가자, 프란츠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가는데...

▶ 관련내용 보기

◇ 글쓴이 정미정

인하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고, 논문으로 Georg B cher의 《당통의 죽음(Dantons Tods)》작품 분석〉이 있다.

<제공 : 북코스모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