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눈]리처드 핼로란/北의 속셈은 주한미군 철수

  • 입력 2001년 9월 5일 18시 33분


세상에서 정말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 누구인지 묻는다면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어쩌면 그는 아버지 김일성(金日成) 주석이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와 중국이 북한에 유리하게 움직이도록 조종하는 ‘간교한 여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 모로 보나 김 위원장이 아버지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미국과의 협상에 대비해 우방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것을 보면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잘 받은 것 같다.

아직 북-미 대화가 언제 열릴지는 알 수 없으나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고 대략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 것인지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양측은 이번 협상에서 미국은 주한미군을 감축 또는 철수하고 북한은 비무장지대(DMZ) 주변에 포진돼 있는 대규모 군사력을 후퇴시키는 문제를 논의하게 될 전망이다.

김 위원장은 이제 막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이용한 장기간의 모스크바 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번 방문기간 중 그가 보여준 행동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국가원수가 24일 동안이나 그것도 150명이라는 대규모의 수행원을 이끌고 대부분 기차여행을 하면서 나라를 떠나 있었다는 점이다. 옴스크에서는 신변 안전을 걱정해 탱크 사격훈련장 방문을 취소했는가 하면 모스크바에서는 공식 환영행사에 빠지기도 했다.

브렘야 노보스테이라는 러시아 신문은 김 위원장의 방문을 ‘초현실적’이라고 표현했다. 이 신문은 러시아 정부가 모스크바 일부 지역에 대해 일반인의 출입까지 금지하며 김 위원장의 방문을 받아준 것을 비판했다.

또 다른 신문은 “러시아 정부가 미국의 미사일방어 계획에 반대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김 위원장으로부터 확보하기 위해 그의 기이한 행동을 참아준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위원장은 이번주 평양을 방문한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으로부터 더욱 큰 우호관계를 확인했다. 북한과 중국의 역사적인 우호관계는 러시아보다 더 깊다. 따라서 장 주석이 김 위원장에게 큰 유대감을 표현한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한국에 대한 김 위원장의 대화 재개 제안이나 한국 내 정치적 혼란이 앞으로 남북한관계나 북-미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김 위원장은 이제 중국과 러시아라는 주요 우방국과의 관계를 대내외에 과시한 뒤에 미국과의 협상에 나설 채비를 갖출 가능성이 높다.

김 위원장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미사일방어 계획에 대해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미숙한 일’이라고 비판해왔지만 이는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연막전술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3만7000명의 주한미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키는 것. 김 위원장은 언제 미국의 핵미사일이 평양으로 날아올지 걱정이 돼 밤잠을 설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비무장지대 바로 건너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언제 북쪽으로 밀고 올라올지 모른다는 점을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이런 점을 누누이 밝혀왔다. 조선중앙통신은 “미군이 남한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은 시한폭탄을 베고 자는 것처럼 위험한 일”이라며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의 가장 큰 과업은 미군을 남한에서 몰아내는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재래식 군사력, 특히 비무장지대 주변에 배치된 군사력의 감축 문제를 협상 의제로 삼기를 원한다고 강조해왔다. 이와 함께 주한미군 문제는 미국과 한국이 논의할 문제라고 주장해왔다.

그렇지만 한국이나 일본 내에 북한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이 두 가지 문제를 따로 분리해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는 물론 미국의 진보적인 인사들로부터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지지를 확보할 것이 분명하다. 심지어 국방비 삭감을 요구하는 미 의회 의원들 가운데 일부도 북한의 주장에 동조할 것이다. 이처럼 주한미군 문제와 북한의 재래식 군사력에 대한 분위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북한을 상대로 협상에 나설 미국의 외교관들은 매우 힘든 협상을 해야 할 것이다.

리처드 핼로란(자유기고가·아시아 안보정책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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