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예술]신경숙 장편소설 '바이올렛'

  • 입력 2001년 8월 3일 18시 34분


여름엔 어떤 종류의 책보다 소설이 잘 읽힌다. 마음껏 놀기 위해 떠나는 휴가 준비를 하면서도 빠뜨리지 않고 한두 권의 소설책을 챙기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폭염과 폭우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나도 몇 편의 소설을 읽었다.

그러던 중 이야기의 흐름이 성급하고 작가의 의도가 지나치게 노출되어 거부감이 일던 몇몇 글에서 느껴지던 씁쓸한 뒷맛을 개운하게 헹궈 주는 한 편의 소설을 읽었다. 최근 발간된 신경숙의 ‘바이올렛’이 그것이다. 이 소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언어는 한여름의 열기를 견딘 식물이 얻어낸 단단한 씨앗처럼 잘 여물었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비교적 은폐되던 작가의 관념이 이 소설의 전반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인생이 낯선 것인가? 아니다. 수 세대에 걸쳐 이유도 없이 존엄성을 무시당한 여인들이 떳떳치 못한 대우로 고통받다가 낯선 방에서 죽어 가는 일은 허다했다”고 진술하며. 주인공 산이는 스물 셋의 젊디젊은 여성이지만, 소설의 앞머리에서 아버지로부터 이유도 없이 버려지는 어머니를 통해 탄생하는 순간 평탄하지 못할 그녀의 삶이 암시된다.

한 남자를 만난 후 낯선 욕망이 들끓기 시작하면서부터 산이에게 감돌던 아슬아슬한 분위기는 서서히 형체를 갖기 시작하고, 작가는 그늘이 짙어지는 산이의 위험한 삶에 확신을 갖고(!) 그녀와 함께 숨쉬며 함께 살아간다. 소설 속 인물과 작가 자신의 모습이 자꾸 겹쳐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바이올렛’의 산이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독자는, 그녀가 살았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 너그러움은 물론, 인습마저 깨뜨릴 수 있는 관능적 세계의 너그러움까지도 갈망하게 된다. 그 때문일까, 산이가 사진기자에 대한 다소 비현실적인 욕망으로 혼미해진 채 광화문 일대를 헤매고 다니는 동안 소설을 읽는 자의 시야도 흐려지는 것은.

하지만 작가는 어두운 강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같은 현상을 통해 더 나은 세계로 흘러가고자 하는 중심부가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당연한 것이리라, 그녀는 소설가이니까. 분명한 것은, ‘바이올렛’의 산이는 신경숙만이 생생하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개성적인 인물이라는 점이다.

산이는 과거에 발표되었던 신경숙의 소설 속에 등장했던 한 주인공의 삶을 연장해서 살아간다. 이것이야말로 이미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보낸 자신의 작품마저도 수없이 검열하고 분석하는 징그러운(?) 작가정신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바이올렛’에서 묘사되는 주인공의 삶은 작가의 자기 모방이 아닌 의식세계의 확장이라 할 수 있겠다.

그 옛날 신경숙 소설의 한 주인공과 많이 닮았으나 어떤 면에서는 훨씬 더 병적인 삶을 사는 산이와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이 세상에서 소외당할수록 강해지는 순수한 삶의 이미지에 집요하게 접근한다. 그 작업이 고된 만큼 간접적으로나마 동참하는 독자의 의식도 고되다.

낯선 욕망에 끌려 다니는 산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정신을 편협하게 몰아가는 욕망에 대해 수없이 질문하게 된다. 그것은 수많은 종류의 욕망이 들끓지만 정작 그 욕망의 대상들과는 정신적·육체적 마찰도 없이 편안하게 살고 있는 ‘정말로 병든’ 현실 세계에 던지는 공동체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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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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