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홍찬식/한일 문화교류 딜레마

  • 입력 2001년 7월 22일 19시 00분


일본 정부가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해 재수정의사가 없음을 밝힌 이후 한일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외교 관계뿐만 아니라 문화 교류에도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벌써부터 한일 문화교류 행사가 무더기로 취소되고, 중고등학교에서 해온 청소년 교류 사업이 중단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문화관광부는 일본 대중문화의 4차 개방조치를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같은 대응은 거센 회오리바람을 연상시킨다. 역사 문제와 관련된 일본과의 갈등은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귀결되곤 했다. 역사적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일본에 대해 우리 측이 피해자로서 격한 감정이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회오리의 또 다른 얼굴은 바람이 지나가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가 싶게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번 교과서 문제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사람들의 관심권에서 사라질 것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 사례가 떠오른다. 일제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며 거창한 기념행사를 벌이고 건물 전체를 부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건물의 존재 자체가 사람들 뇌리에서 사라지고 있다. 총독부 건물을 위해 경복궁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교훈이 함께 잊혀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일본 문제를 다루면서 보다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순간적으로 파르르 흥분했다가 쉽게 잊어버리기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다뤄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일본에 대해 우리가 물러설 수 없는 것은 절대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와 별도로 일본이 지리적인 이웃으로서 피할 수 없는 존재라면 평상적인 교류는 교류대로 진행하는 것이 옳다. 대표적인 예가 문화 분야다.

하지만 이번 정부 대응책 가운데는 즉흥적이고 졸속적인 것이 있다. 내년 월드컵 행사와 관련, 정부 차원에서 마련한 한일 공동 문화행사를 취소할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나 일본 대중문화 개방 중단 문제가 여기에 해당된다.

월드컵 행사의 경우 문화관광부 산하 문화예술 기관들은 정부의 강경기류에 맞춰 공동 행사 계획을 유보했다고 한다. 그러나 월드컵 행사는 일본과의 공동행사이기 이전에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행사이기 때문에 행사 중단은 스스로 발목을 잡는 꼴이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문제는 일본의 의사와 상관없이 우리측이 문화교류를 막고 있는 형국이다. 문화의 이동과 교류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대중문화 수입을 인위적으로 막고 있는 것도 비정상인데 이것을 ‘압력’을 가하는 무기로 사용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또 다른 억지로 비치기 십상이다.

문화교류는 어쩌면 역사교과서 문제를 포함해 상대방을 가장 효과적으로 설득시킬 수 있는 수단이다. 외교와는 별개로 문화교류에서는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문제 해결을 위해 오히려 생산적일 수 있다. 한일 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역사의식을 가다듬는 일이 아닌가 싶다. 비극의 역사를 절대 잊지 않고,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역사 문제의 가장 근본적이고 확실한 해법이다.

홍찬식 문화부장 chansi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