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락교수의 이야기 경제학-5]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

  • 입력 2001년 6월 24일 18시 45분


얼마 전 독일의 한 대학총장이 내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다. 대감 갓을 쓰고 한복 상의를 입은 채 긴 담뱃대를 든 다음 병풍 앞에 앉아서 사진을 찍어 보자고 했더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지켜보던 부인도 좋아서 찍어달라고 하면서 활짝 웃었다. 부부 모두 대감 갓이 특히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때 얼마나 환하게 웃었던지, 그 웃음이 아마 최근 몇 년 동안의 그들 웃음 중에 가장 밝은 것이 아니었는가 했다.

▼ 글 싣는 순서▼
1. 서양은 언제부터 우리를 앞섰나
2. '국부론'의 처방 따르면 잘 사나
3. 규칙에 살고 반칙에 죽는다
4. 자유경제는 윈·윈게임
5.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
6. "검의 고수엔 칼로 덤비지 말라"
7. 지능 지수 높은 동아시아인
8. 세계 제일 '경제코치'포진
9. 미래주역은 '기업가적 두뇌'
10. '일본 위기'는 잘못된 진단
11. 한강 개발가치 무궁무진
12. 작지만 큰나라 '코리아'
13. 세계 지배상품 만들자
14. 세계수준 대기업 바로알자
15. 글로벌시대의 교육
16. 지식산업시대의 국토
17. 지식기반 산업 준비

그에게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모자가 어느 것인가, 그리고 세계에서 햇빛이 통하게 만든 모자를 도대체 본적 있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 쓰고 있으면서도 모르느냐고 했더니 알겠다고 하면서 크게 웃었다. 세계에서 제일 긴 담뱃대가 어느 것인가 하고 물었더니 바로 이것이 아니겠느냐고 하면서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우리 문화에는 자세히 보면 많은 특성이 있다.

중국 여러 대학의 부총장 일행 9명이 방문했을 때도 같은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모두 그야말로 어린이들처럼 즐거워하면서 다투어 찍으려고 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포즈를 취할 때마다 일행들 모두 카메라를 꺼내서 셔터를 요란스럽게 눌러댔다. 이런 대감 갓이 중국에도 있느냐고 했더니 없다고 했다. 이들은 계속 기분 좋은 표정으로 준비한 선물을 우리에게 전달했다. 모두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거라고 했다.

선물을 가지고 방문하는 외국 귀빈들에게 줄 답례품을 정하는 것은 신경이 많이 쓰이는 일이다. 유명 브랜드의 외제볼펜이나 넥타이를 선물하려면 우선 값이 비싸다. 뿐만 아니라 반응이 시큰둥한 경우도 많다. 한때 어느 대학에서 한시(漢詩)를 잘 새긴 비싼 동판을 중국귀빈들에게 선물했지만 그들이 한국을 중국의 문화 속국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서 중지했다고 한다.

우리의 전통 모자인 대감 갓은 우선 값이 싸다. 이를 쓰고 사진을 찍게 한 다음 선물로 주면, 받고 좋아하지 않은 외국인을 아직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내가 선물로 사용하는 산(山)모양의 대감 갓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디자이너가 개량한 것이다.

대감 갓을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어떻게 쓰겠다는 포부까지 밝히고, 심지어 그 길로 바로 쓰고 나가는 외국귀빈들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사진의 배경이 된 병풍 속에 정조대왕이 만든 한강 배다리(어선으로 만든 다리)를 설명해주면 한국문화를 극찬하기까지 한다. 우리 조선(造船)산업의 뿌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외환위기를 겪은 후 어떤 사람들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면서 한국적인 것은 무엇이건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한국은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로, 가장 오랜 기간 성장한 경제모델로도 유명하다.

전세계 개발도상국들이 이 기적과 비밀을 배우려고 하는데 우리는 오히려 이를 버리려고 드는 것이 아닌가. 적잖은 한국 기업들은 한국식으로 경영하여 ‘포천’지가 선정하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리스트’에 들어가 있다. 한국식 기업경영과 조직으로 세계에서 일등하는 제품도 이미 70개를 넘었다. 이런 기업이나 제품들은 대부분 우리 문화의 장점을 잘 살린 것들이다.

모든 것을 서양식으로 해야 한다는 사람들은 한국적인 것을 보고 배우려고 방문하는 서양인들에게 서양제 볼펜이나 넥타이를 선물하여 실망시키는 것과 같다. 외국인들의 방식을 그대로 흉내만 내다가는 결코 앞설 수 없다. 심지어 조롱당할 우려도 있다. 글로벌 지식사회에서는 우리가 우리문화의 장점을 잘 살려 글로벌 스탠더드를 만들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한국인과 한국문화에는 그런 저력이 얼마든지 있어 보인다.(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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