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송상근/더 이상 구호는 안된다

  • 입력 2001년 5월 23일 18시 27분


의약분업과 의료보험 재정문제를 취재하면서 기자가 가진 의문 중 하나는 “분업시행이 의보재정에 미칠 영향을 왜 정부가 신중히 검토하지 않았을까”하는 점이었다.

최근 차흥봉(車興奉) 최선정(崔善政)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정부 관계자 및 학계인사와 얘기를 나누고 누렇게 변한 옛날 자료를 구해서 읽어본 결과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됐다.

보건사회연구원 정우진(鄭宇鎭·연세대 교수) 박사가 분업시행시의 추가재정 문제를 독자적으로 연구했다. 복지부 실무자들이 이를 격려했지만 학계와 시민단체의 분업 강행론자들은 강하게 비판했다. 의료계와 정부가 재정추계를 놓고 공문과 자료를 계속 주고받았다….

이런 논의는 99년 5월 10일 의료계-약계-시민단체가 분업안에 합의한 뒤 시작됐다. 그러나 분업의 경제적 영향을 차분하게 생각해 보려는 움직임은 의정(醫政)대결, 의약(醫藥)갈등, 시민단체와 의료계 대립 속에 묻혔다.

정부는 분업을 정권 차원의 개혁과제로 내세웠고 시민단체는 이를 적극 지지했다. 의료계는 뒤늦게 정부안에 반대하며 집단 파업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애꿎은 국민만 진료를 받지 못하고 약을 구하러 헤매는 불편을 겪고 호주머니를 털었다.

한 주부는 이렇게 말한다. “분업을 시행할 경우 국민부담, 의료계 수입, 추가 재정이 어떻게 될지 합리적으로 따지기보다 ‘개혁’과 ‘의권(醫權)’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갖고 상대방을 밀어붙였던 게 의정 양측 및 시민단체의 자세였다.”

정우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비용과 편익을 객관적으로 연구해서 분업을 계속할지, 세부안을 일부 바꿀지, 분업 전으로 돌아가야 할지 결정해야 주먹구구식의 정책결정을 막을 수 있다.”

31일 의보재정 안정화 종합대책 발표를 계기로 정부와 의료계가 ‘구호’가 아닌 ‘숫자’를 놓고 ‘대화’에 나서기를 기대한다.

송상근<이슈부>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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