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 입력 2001년 4월 13일 18시 47분


◇영조의 웅장한 혼례식 240년만에 다시본다

신병주 지음

292쪽 1만8000원 효형출판

1759년 초여름, 창경궁. 66세의 신랑 영조와 15세의 신부 정순왕후 김씨가 혼례를 올렸다. 1757년 왕비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는 것이었다. 당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와 그 부인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던 신부. 이 나이 어린 신부는 훗날 사도세자의 죽음에 빌미를 제공하고, 순조 대에 수렴첨정을 하면서 정국의 태풍으로 등장했던 바로 그 여인이다.

참 궁금하다. 조선시대 왕실의 결혼식은 과연 어떠했을까? 왕비는 어떻게 뽑았고 혼수품으론 무엇이 오갔을까?

이 책은 그 혼례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 조선시대 왕실의 결혼식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다. 이 책은 ‘영조정순후 가례도감의궤’(당시 혼인에 관한 기록과 그림)를 비롯해 각종 관련 사료들을 통해 당시 왕실 혼례의 전모를 알기 쉽고 흥미롭게 복원해냈다. 저자는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왕실 혼례 과정을 살펴보면, 왕비 간택을 거쳐 6례(六禮·여섯차례의 절차) 순으로 진행된다. 왕비의 간택 심사는 3차에 걸쳐 진행된다.

정순왕후 간택시의 일화 하나.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다른 후보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 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했다. 지혜로움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정순왕후는 왕비로 뽑힌 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해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말했다고 한다. 열 다섯 어린 나이에 왕비의 체통까지 생각할 만큼 만만치 않았던 여인.

그러나 간택이 되는 순간,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곧바로 별궁에 가서 혹독한 왕비 수업을 받아야 했으니, 어찌 보면 고행의 길이었을지도 모른다. 정순왕후의 경우, 6월9일에 왕비로 간택이 되고 6월22일 혼례를 올렸으니, 불과 13일만에 교양학문과 예절 등 그 복잡하고 엄격한 왕실법도를 익혀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간택에 참가한 처녀들은 같은 조건에서 후보를 고른다는 취지에서 모두 똑같은 복장을 했다. 그러나 1차, 2차, 3차 간택으로 가면서 후보들의 옷은 점점 더 화려해져 왕비 복장에 가까워졌다. 마지막 3차 간택에서 아깝게 탈락한 후보들은 거의 모두 왕의 후궁이 되었다.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도 가득하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가례도감의궤의 가치를 절로 알 수 있다. 특히 왕의 친영(親迎·국왕이 별궁에 있는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절차)행렬 그림은 그 성대함과 정교함으로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1.5㎞에 이르는 실제 행렬을 묘사한 그림으로 왕과 왕비의 가마를 비롯해 말 탄 관료와 호위병, 악공, 내시, 궁녀, 각종 의장을 들고 가는 사람들 1188명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등장 인물도 때로는 뒷모습으로, 때로는 옆모습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그려져 생동감을 더해준다.

이와 함께 의궤에는 담당자들의 업무 분담과 협조, 경호계획, 행사에 필요한 물품, 사람들에게 지급된 급료 등이 매우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18세기 왕실의 혼례 문화 보고서라 하기에 충분한 이 책. 왕실 혼례의 다양한 모습을 만나는 일이 색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온다.

아울러 당시 왕실의 혼례 문화를 통해 18세기 영조대의 정치상황까지 엿볼 수 있다. 또한 ‘사고(史庫)는 왜 산으로 갔을까’ ‘조선시대엔 몇 끼를 먹었을까’ 같은 역사 상식이 들어 있어 책의 매력을 더해 준다.

<이광표기자>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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