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민병욱/얼 심기

  • 입력 2001년 4월 4일 18시 30분


과거에는 아이를 낳으면 그의 몫으로 나무를 심어주던 풍습이 있었다. 딸을 낳으면 뜰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오동나무에 새가 깃들 때 쯤 딸은 시집을 가고 부모는 나무를 베어 장롱을 만들어 혼수로 주었다. 아들을 낳으면 선산에 느티나무나 잣나무를 심었다. 나무의 주인공이 늙어 죽으면 후손은 그 나무로 관을 만들었다. 사람의 일생과 나무를 하나로 묶어주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나무의 주인공은 죽음 이후까지 자신과 함께할 나무에 각별한 사랑을 쏟지 않겠는가.

▷같은 맥락인지 어느 시인은 식목일에 부쳐 이런 시를 지었다.'꿈을 심는다./ 이 땅의 야망을 심는다./ 피와 핏줄로 엉킨 사랑의 씨앗을 심는다./ 다 벗은 산/ …/ 그 찢어진 가슴팍에/ 분노를 심는다./ 설움을 심는다./ …/ 청산 빽빽이 야망을 심어/ 세계를 데려올/ 우리의 이 땅, 조국의/ 얼을 심는다.' 나무를 심는 일이 꿈과 사랑, 야망에다 조국의 얼을 심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이 땅의 산은 왜 옛처럼 울창하지 않으냐는 분노까지 시에 담았다.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도 명작 '나무를 심은 사람' 에서 나무심기야 말로 얼 심기라는 것을 강조했다. 잡풀만 자라던 프로방스지방의 황량한 고원지대를 삼림으로 변모시킨 엘제아르 부피에는 근 40년간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100개씩 도토리를 산에 심었다. 아내와 자식을 잃고 황무지에 홀로 들어온 그는 밤엔 호롱불 밑에서 질좋은 도토리를 골랐고 낮엔 그걸 심었다. 고독하게 나무심는 일만 해 말조차 잃었지만 그 한 사람 덕분에 일대는 프랑스에서 으뜸가는 풍광지대로 바뀌었다. 나무와 인간, 바로 부피에의 얼을 동일시한 것이 나무를 심은 사람 의 주제다.

▷오늘이 식목일이자 한식, 청명이다. 4월5일을 식목일로 정한 것은 청명을 전후해 나무를 심어야 튼튼하게 뿌리를 내려 잘 자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턴가 우리에겐 식목일은 그저 봄을 만끽하며 하루를 보내는 날 쯤으로 여기는 풍조가 생겨났다. 옛사람들처럼 나무와 인생을 동일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오늘 하루쯤 나의 얼을 심는 기분으로 나무를 심어 자연과 나를 하나로 묶어보는 게 어떨지 권유해본다.

<민병욱 논설위원>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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