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아의 책 사람 세상]작지만 강한 일본의 양심

  • 입력 2001년 3월 30일 18시 49분


끊임없이 교과서 왜곡을 되풀이한다고 해서, 일본은 국가 전체가 완전히 양심이 썩어빠진 나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오히려 일본의 지성인들은 끊임없이 국가주의와 그에 따른 진실의 왜곡을 반대해 왔다.

서울대 총장과 도쿄대 총장이 도쿄대 졸업식에서 함께 일본의 역사 왜곡을 비판했으며, 일본의 NGO들이 역사 왜곡 교과서에 항의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니 일본 시민단체와 지성계의 활력이 새삼 느껴지는 듯하다.

패전 후 일본 지성계의 ‘천황’이라고까지 불렸던 마루야마 마사오는 논문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한길사·1997년)에서 일본 국가주의와 파시즘에 대해 심각하게 자성한다. 일본의 국가주의가 근대적 개인주의와 그에 수반하는 책임 의식을 보여주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이 논문은 일본 파시즘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이다.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는 ‘내셔널리즘과 젠더’(박종철출판사·1999년)에서 2차 대전 때 일본의 ‘종군위안부’ 제도를 다루면서 페미니즘과 국가주의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 깊이 있게 탐구한다.

우에노는 전쟁 때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폭력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왜 여성은 전쟁 때 가장 먼저 유린되고 전쟁 후에는 입을 다물도록 강요받는가 하는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는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강간이 뒤따른다’든가 ‘종군 위안부들은 자발적 매춘을 한 것’이라는 일본 우익의 논리를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인문학의 입장에서 일거에 분쇄해 버린다.

재일(在日)학자들과 양심적인 일본인 학자들의 연구 논문 모음인 ‘국가주의를 넘어서’(삼인·2000년)에도 역시 한국과 일본 사이의 거리, 역사 교육의 문제 등 첨예한 문제들에 대한 고뇌가 실려 있다.

역사학자인 요시에 아키오는 여기 실린 논문 ‘자유주의 사관과 역사교육’에서 “일본 우익들의 이른바 ‘자유주의 사관’은 서로 가치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단편적이고 위험한 사상”이라고 일갈한다.

그리고 강상중은 ‘국민의 심상 지리와 탈국민의 이야기’에서 종전 직전 자결을 각오한 ‘반도인’과 그 옆에 선 ‘내지인’ 배우자를 찍은 사진 한 장을 떠올린다. 제국주의 국가가 강요한 전쟁으로 인해 빚어진 그 슬픈 역사를 지워버리려는 것이 이른바 일본의 ‘자유주의 사관’인 것이다.

자신의 국가가 과오를 범하는 것을 항의하고 저지하려 하는 것은 양심적 개인의 의무일 뿐 아니라 애국적 시민의 의무이기도 하다. 일본의 양심이 일본의 ‘진실된’ 역사를 지킬 수 있기를 바란다.

송경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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