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규민/흰머리경제학

  • 입력 2001년 3월 27일 18시 44분


‘손자들은 집에 두고 놀러 오세요.’ 사설 경로당의 선전문구가 아니다. 요즘 미국 텔레비전에 자주 등장하는 ‘디즈니랜드’의 광고 내용이다. 어린이 천국이라는 디즈니랜드가 느닷없이 할아버지들을 대상으로 유인광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흰머리세대’가 갖고 있는 은행통장의 잔고를 소비로 연결시키려는 상술이다. 컴퓨터회사들이 자판 글씨를 키운 제품을 선보인다든지, 유명 의류업체들이 다투어 노년층을 노린 디자인을 개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18세가 넘어서도 부모와 함께 살면서 용돈을 타서 쓰는 것을 ‘기생충 생활’이라고 여기는 미국에서 흰머리세대는 경제적으로 가장 안정된 계층으로 여겨진다. 자식 뒷바라지도 끝난 터에 달마다 꼬박꼬박 나오는 연금은 가장 확실하게 소비로 연결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특히 경기가 하락할 때 신세대의 소비는 급격히 줄지만 흰머리세대의 지출은 불황의 영향을 가장 나중에 받는다는 분석도 있어 미국의 기업들은 노년층의 호주머니에 그윽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고액과외다 조기유학이다 해서 어렵사리 대학에 보내고 나서도 매학기 엄청난 등록금 부담은 예외 없이 부모의 몫이다. 그걸로 끝난다면 그래도 낫다. 학업을 마친 자식을 결혼이라도 시키려면 우리네 부모들은 혼수 마련에 또 한번 허리가 휘고 아들이 혹 대졸 실업자라도 되면 생활비까지 보태주느라 한숨을 쉬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세상에 이토록 자식양육에 늙도록 발목을 잡히는 나라가 우리말고 또 있을까.

▷수입곡선은 급격하게 떨어지고 가파르게 올라간 지출곡선이 드디어 공식적인 수입능력을 관통할 때 우리의 흰머리세대는 인생에서 가장 위태로운 시기를 맞는다. 사회적으로 퇴출 대상으로 분류되면서 자리보존에 안간힘을 써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늘어만 가는 지출을 감당하지 못해 검은 돈의 유혹을 가장 강하게 받는 것도 이즈음이다. 평생 쌓아 온 명예를 한순간에 송두리째 잃는 위험 부담은 그래서 이 때가 가장 높다. 미국의 흰머리세대가 디즈니랜드에서 여생을 즐길 때 불쌍한 우리네 아버지들은 공중에서 외줄 타기를 해야 하는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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