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전주성/나라빚 걱정말라고 ?

  • 입력 2001년 3월 22일 18시 36분


우리나라의 국가채무, 엄밀하게는 정부가 진 빚이 지난 1년 동안 12조원이 늘어나 지난해 말 현재의 잔고가 120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보증채무 상당액 사실상 빚▼

빚이 느는 것은 개인이나 나라나 달가울 것이 없다. 그러나 살림을 하다 보면 적자가 날 수도 있기 때문에 빚을 진다는 사실 자체를 흠잡기는 어렵다. 또 부채의 절대치만 봐서는 문제의 심각성을 판단하기 힘들다. 똑같이 1000만원의 빚을 졌다고 해도 연봉이 1억원이 넘는 사람과 3000만원 정도인 사람이 느끼는 부담감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빚도 보통 국민소득 규모를 가늠하는 수치와 비교해서 본다. 작년 말 현재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3.1%에 해당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부채 비율이 70%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의 부채 수준 자체는 아직 크게 우려할 만한 상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경제가 GDP의 140%에 가까운 누적재정적자로 허덕인다는 소식은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국가채무 상태도 한꺼풀 벗겨 보면 걱정스러운 면이 적지 않다. 우선 공식적인 부채 집계에서는 빠지지만 정부가 보증을 선 채무 규모가 작년 말 현재 74조5000억원이나 된다. 과거에는 미미했던 보증채무 규모가 최근 현저하게 커진 이유는 구조조정을 위한 64조원의 공적자금이 정부보증채를 통해 조성됐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추가 공적자금 40조원을 조달하기 위한 공채 발행이 대부분 올해 이뤄질 예정이어서 정부의 빚 보증 규모가 100조원을 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보증채무를 국가채무에 넣느냐 마느냐로 정부와 야당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이런 문제는 우길 일이 아니다. 보증액수 중 떼일 것으로 추정되는 몫은 사실상의 빚이라 생각하고 나라 살림을 꾸리는 것이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분류법에서는 보증채무를 공식집계에 포함시키지 않으니까 신경쓸 필요 없다는 식의 논리를 펴던 일부 국회의원이나 관료들을 보면서 당혹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물론 모든 잠재적 부채를 실현된 부채와 동일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주장도 무리한 얘기다.

필자의 연구팀은 보증채무의 핵심인 구조조정 공채 104조원 중 절반에 해당되는 52조원 정도는 향후 손실 처리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경제 여건이 나빠질 경우에는 65조원 정도, 호전될 경우에도 40조원 정도는 떼일 것으로 본다. 여기에다 정부가 추정한 이자부담액 42조여원을 더하면 공적자금 조성으로 인한 총 재정비용이 100조원 가량 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요즘 건강보험의 재정이 거덜났다고 난리지만 우리나라의 각종 사회보장제도에 적자 비상이 걸린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쉬쉬하고 넘어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소란을 피우며 허둥대는 모습을 보면서, 이 뿐만이 아니라 다른 정책들도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의심과 분노가 싹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구조조정이나 사회보험 외에도 앞으로 예상되는 재정수요가 만만치 않다. 남북경협의 돈 줄도 당분간은 정부재정일 것이다. 산업은행의 현대 회사채 인수도 결국 현대의 대북사업에 대한 우회적인 정부 보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대대적 세제개혁 서둘러야▼

정부의 빚이 지나치게 늘면 설사 기본적인 지출이 세입 범위 내에서 이뤄진다고 해도 이자 부담으로 인한 적자 압력이 커진다. 이자를 갚기 위해 다시 빚을 낼 정도가 되면 남미형 경제위기의 문턱에 다다랐다고 봐야 한다.

지금은 멀리 내다보고 재정의 큰 틀을 걱정할 때다. 단기적인 재정수지에 일희일비하고, 억지 춘향식의 균형재정 목표연도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재정 건전화에 대한 법 제정도 재정의 투명성과 규율을 강화하는 큰 틀을 잡는 데 초점을 맞춰야지, 현실성없는 구속조항들을 넣는 것은 재정 왜곡만 가중시킬 수 있다. 지금 시급한 일은 예산의 효과적 집행을 위한 제도개선과 비효율과 불공평으로 얼룩진 세제(稅制)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준비하는 일이다. 내 임기 중에 성과가 보이는 일만 하려는 근시안적 사고가 관료와 집권층을 지배하는 한 재정은 앞날도 순탄치 않을 것이다.

전주성(이화여대·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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