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이래서 명작]하근찬의 '수난이대'

  • 입력 2001년 3월 13일 10시 59분


"'아버지' 양쪽 겨드랑이에 지팡이를 끼고서 있는데, 스쳐가는 바람결에 한쪽 바짓가랑이가 펄럭거리는 것이 아닌가."

◇겹겹이 쌓인 시체 사이에서 찾은 아버지

하근찬이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났던 시간들에는 언제나 전쟁이 있었다. 그가 태어났던 해에 바로 만주 사변이 일어났고 연이어서 유년 시절에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이 두 전쟁은 동화 속의 기억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진짜 혹독한 경험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됐다. 태평양전쟁의 여파는 어린 소년의 가슴에 충분한 생채기를 남겼고 더불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동반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년 시대의 경험은 20세 청년이 되었을 때 일어난 한국 전쟁에 비해서는 오히려 적은 것이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한 명의 병사로서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참전보다도 더욱 고통스러운 현실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반동으로 몰리면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아프고 서러웠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전투보다도 더 참혹하고 비통스런 일을 겪었는데, 그것은 부친의 죽음이었다. 반동이라 하여 학살당한 부친의 시신을 찾기 위해 가히 시체의 바다라고 할 수 있는 처참한 현장을 더듬기도 했던 것이다. 그 시체들 전부가 타살이어서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나는 그 때 전쟁의 잔학성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소름끼치는 절망을 느꼈었다. 어머니와 둘이서 시신을 찾아 가매장을 하던 그 날의, 마치 지옥의 하루 같던 일이 지금도 머리에 생생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들은 졸지에 반동 집안으로 몰리게 됐고, 하근찬 또한 오랫동안 아버지란 죽음의 늪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전쟁의 그림자, 삶의 의지

하근찬은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고 2차 대전을 전후한 어려운 시기를 살아왔다.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때 중학교에 진학해서 최초로 전쟁의 참혹함을 눈으로 확인했고 8.15 해방을 겪으며 성년기를 맞았다. 6.25가 발발했을 때 그는 시골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부친을 잃는 참변을 경험했다.

이후 그는 계속해서 교육 관계 잡지사 기자를 하면서 몇 권의 단편집과 장편을 창작했다. 그는 등단 시부터 '역사 속에 놓여진 인간의 비극'이란 하나의 일관된 주제에만 몰두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에는 가슴 저미는 로맨스는 없다.

그의 문학 세계는 대체로 세 갈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6.25를 제재로 한 것으로서〈수난 이대〉〈흰 종이 수염〉〈산울림〉〈분(糞)〉〈붉은 언덕〉《야호(夜壺)》등이 이 계열의 중요한 작품이다.〈수난이대〉가 한국일보에 당선된 1957년에서부터《야호》가 완성된 1971년까지의 기간이 대개 여기에 해당된다.

둘째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일제 말기에 작가가 경험한 유년의 기억들이 주로 회상의 형식으로 그려지는 작품들이다.〈족제비〉〈그 해의 삽화〉〈일본도(日本刀)〈죽창을 버리던 날〉〈삼십이매의 엽서〉〈조랑말〉《산에 들에》등과 같은 작품들이다.

대체로 1970년대 초에서 장편《산에 들에》가 완성되던 1980년대 중반까지의 시기이다. 셋째는 위의 두 갈래와 병행하여 인정 세태의 묘사, 부정적 현실에 대한 거부 등 주로 일상의 체험을 다룬 작품들이다. 이러한 작품들에는〈너무나 짧은 봄〉〈서울 개구리〉〈전차 구경〉이 있다.

현재까지 이르는 그의 문학 여정을 곱씹어 볼 때 결국 그의 작품의 주류는 첫째와 둘째 갈래에 놓여 있다. 그의 일관성 있는 작품의 테마는 전쟁이었다. 전쟁의 잔학성에 대한 비판과 치열한 항변이 언제나 그를 따라다녔다.

하근찬에게 있어서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육체와 심리에 커다란 상흔을 남긴 테러였다. 하지만 그것이 가져 온 시련이 평범한 인간의 삶을 일그러뜨릴 수 없다는 완강한 의식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공포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전쟁은 숨막히는 공포라기보다는 막연한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 시골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다가온다.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박만도'는 삼대 독자인 아들 '진수'가 돌아온다는 통지를 받고 마음이 들떠서 일찌감치 읍내의 정거장으로 나간다. 그런데 그는 이상하게 마음으로 스며드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길이라 하니 많이 다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는 팔이 없어서 늘 주머니에 한쪽 소맷자락을 꽂고 다닌다. 아들의 귀향 생각에 휩싸여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기다린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면서, 언젠가 술에 취해 물에 빠져 옷을 널어 말리면서 사람들이 지나가면 물 속으로 들어가 얼굴만 내놓았던 겸연쩍었던 일을 생각한다. 그는 정거장으로 가는 길에 '진수'에게 주려고 고등어 두 마리를 산다. 들뜬 마음에 성큼 정거장에 가지만 아들이 돌아올 시간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정거장에서 기다리는 동안 '만도'는 과거의 일을 회상한다. 그는 일제의 강제 징용에 의해서 남양의 어떤 섬에 끌려갔었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비행장을 닦는 일에 동원되었는데, 굴을 파려고 산허리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하여 불을 당기고 나서려는 순간 연합군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당황한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했던 굴로 들어가 엎드렸다가 팔을 잃었다. 기차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하는데도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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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희 <이화여자 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의 박사과정에 재학중 / 북코스모스 가이드북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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