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격세지감

  • 입력 2001년 3월 2일 18시 32분


일본 역사 교과서가 ‘격세지감’을 말하도록 바뀐 지 10년이 안된다. 격세지감은 92년초 미야자와 기이치 전총리가 중의원에서 한 표현이다. 그 직전에 그는 한국 국회에서 연설했다.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실로 마음 아프고 진정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후세에 우리 세대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역사를 올바로 전해야 한다.’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 하는 주목할 만한 발언이었다.

▷미야자와 연설 내용은 그대로 한 일본 교과서(實敎출판사)에도 오르게 되었다. 미야자와는 서울 연설 뒤 중의원에서 ‘이웃 나라에 대한 배려로 검정 기준이 바뀌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고 했던 것이다. 일본의 이상한 역사관, 상습적 망언, 즉 ‘한국 지배나 중국 침략은 자존 자위(自存 自衛)를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시아 해방 전쟁이었고 그쪽(피해국)에도 좋은 일을 한 게 아니냐’는 소리에 비추어 확실히 ‘격세지감’이었다.

▷그러나 역사 교과서가 제대로 바뀐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침략’을 ‘진출’로, 독립만세운동을 ‘폭동’으로 쓴 것도 있었다. 일본 지성인들도 미야자와의 ‘격세지감’ 발언에 치미는 분노를 말했다. 저널리스트 야스에 료스케는 이미 고쳐 썼어야 할 역사를 팽개쳐온 ‘정부의 사보타주와 일본의 국민정신’을 탄식했다. 이웃 나라가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고 일본내 양심 세력도 개선을 주장해 왔는데 92년까지 무슨 짓들을 해 왔느냐는 질책이었다.

▷이제 ‘격세’ 10년이 가기도 전에 일본 역사책은 거꾸로 가려 한다. ‘도둑(열강 제국)이 판치는 시대에 일본도 좀 빼앗고 훔쳤기로서니’하는 양심도 도덕도 없는 사무라이 사관으로 돌아간다. 문부과학성은 ‘고칠 만큼 고쳤다’고 하고 모리 요시로 총리는 “검정 중인데 왜 내용이 유출되어 시끄럽냐”고만 한다. 92년 이전 일본 정부의 사보타주 수법 그대로다. 일본의 몇몇 지식인들의 자성만 들리는 데서 일본의 ‘국민정신’을 읽게 된다. 21세기를 짊어질 일본 후세에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겠다던 총리는 어디로 갔나.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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