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정민/과거사 무시한 남북관계 안된다

  • 입력 2001년 2월 28일 18시 31분


집권 민주당의 국가경영전략연구소 부소장인 황태연(黃台淵) 동국대 교수가 27일 한 포럼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6·25전쟁에 책임이 없으며 대한항공(KAL)기 폭파를 지휘했다는 증거도 없고 조사할 수도 없는 상황" 이라면서 "따라서 김위원장이 사과할 일이 아니다" 는 취지의 발언을 해 정부 안팎으로 상당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지휘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상의 자유가 있는 만큼 정책 개발 차원에서의 열띤 논쟁을 마다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일제침략 묵인하라는 꼴▼

그러나 황 교수의 주장과 논리는 여러 측면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우선 김정일 위원장이 6·25 전쟁 당시 유아였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고 김일성 주석의 권력을 승계하고 북한의 실질적인 주권을 대내외적으로 대표하는 최고 지도자로서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황은 다르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부가 일본계 미국인들을 전쟁 종료 시점까지 수용소에 강제로 감금한 점과 그 이후에 미국 정부가 취한 태도에서 교훈을 삼을 수 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미국의 전시행위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으며 의회에서 보상법 심의를 수락했다. 사건 발생 반세기 이후 빌 클런턴 전 대통령 재임 시절 그 보상금이 드디어 지급됐다. 뿐만 아니라 초일류 컴퓨터 기업인 IBM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 학살 때 사용된 기계 가운데 일부를 자사에서 제공한 사실만으로도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따라서 황교수의 논리라면 일제의 챔략행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현재의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들이 사죄 및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나 과연 이러한 논리를 납득할 수 있겠는가?

이와 함께 황교수는 여객기 테러와 같은 국제법상의 반인도적 범죄를 사과 받자는 주장은 사과하면 면죄해주자 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 주장했으나 사과했다고 국제법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것이 아닌 만큼 설득력이 없다.

황교수의 발언이 더욱 문제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현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대북 화해정책과 직간접적으로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과, 특히 올해 봄으로 예상되는 김위원장의 서울 답방 이전에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과거사 문제에 대한 여당과 정부의 애매모호한 태도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뿐만 아니라 현 정부의 대북정책이 아무리 민족적 화해와 남북긴장 완화를 위해 추진되고 있다고 믿더라도 국가의 정체성을 훼손해서는 안되며 정부는 더 이상 민족화해라는 기치 아래 실용주의적 상호주의와 북한의 과거사 문제를 묵인해서는 안된다.

대한민국 국민의 절대 다수가 남북간의 화해협력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정부와 집권당이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바로 똑 같은 국민의 절대 다수가 일방적인 양보와 과거사를 무시한 남북관계를 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현 정부 출범 이후 6·15 남북공동선언, 남북이산가족 상봉, 국방 및 경제회담 등 남북관계에 있어서 굵직한 진전이 있었음은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가 누차 강조하고 있는 한반도 냉전체제의 해빙과 남북관계의 대전환의 핵심적인 전제조건은 남북관계의 과거사 조명이라고 믿는다.

분단의 반세기를 돌이켜 보았을 때 6·25전쟁은 물론, 1969년 청와대 기습사건, 1974년 육영수 여사 암살 사건,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83년 아웅산 테러, 1987년 KAL기 폭파, 1996년 잠수함 침투사건, 1999년 서해교전 등 남조선 해방 을 위해 북한이 저지른 일련의 테러 및 공작을 숱하게 많았다. 그렇다면 이들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어디 이 뿐인가. 미전향장기수의 북송을 남북화해 차원에서 과감하게 허락했다면 납북인사와 국군포로의 운명은 누가 책임지는가? 물론 대를 얻기 위해 소를 임시적으로 저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자세, 미얀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의 감금해제 촉구, 동티모르의 인권보호를 위한 상록수 부대 파견 등은 다른 잣대로 평가되는가.

▼진정한 화해는 사과서 비롯▼

진정한 화해는 사실규명과 사과 그리고 법적 절차의 순서로 이어져야만 한다고 볼 때 침묵을 깨고 눈을 뜰 때가 왔다고 본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존엄성과 정체성을 더 이상 훼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정민(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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