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에 의뢰 사실확인까지▼
윈스턴 처칠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는 영국 총리로서 감당했던 2차대전을 자신의 경험에 각종 문서와 사서(史書)들을 접목시켜 5부작의 회고록을 완성함으로써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광까지 안았다. 헨리 키신저 역시 미국 대통령 외교안보보좌관으로서의, 그리고 국무장관으로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하되 당대의 기록들을 충분히 섭렵해 2부작의 회고록을 출판할 수 있었다. 두 책 모두 꼼꼼히 수집된 자료들, 역사적 통찰력, 그리고 뛰어난 문장력의 결합을 보여 준다. 후세 사람들이 참고할 것도, 교훈으로 삼을 것도, 인용할 것도 참으로 많다.
“회고록이란 이렇게 쓰는 것이다”라는 전범(典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학자들은 흔히 ‘리쭝런(李宗仁) 회고록’을 꼽는다. 리쭝런은 북벌에 참가했던 국민당 정부의 장군으로 부총통에 총통대리까지 지냈으나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자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결국 베이징(北京)으로 돌아간 정치가이다. 그는 미국 망명 때 회고록 집필에 들어갔는데, 중국사 전공의 컬럼비아대 조교수 탕더강(唐德剛)으로 하여금 자신을 3년에 걸쳐 168회나 회견하도록 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탕교수가 작성한 초고를 놓고 중국현대문화사의 거봉으로 꼽히던 마틴 위버 교수의 총괄 아래 당대의 정상급 중국 전문가 9명으로 하여금 사실에 착오가 없는지 검토하도록 했다. 어떤 사건에 관해 리쭝런의 눈으로는 그렇게 보았다고 해도 전문가들이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론하면 그 반론을 충분히 새기고자 했기 때문이다.
구체적 자료보다 주로 기억에 의존한 대표적 회고록으로 ‘흐루시초프는 기억한다’를 꼽는다. 소련공산당 제1서기에서 실각한 뒤 은둔생활을 하던 때 5년에 걸쳐 은밀히 녹음해 놓은 것을 미국에 몰래 내보내 출판한 것이다. 그러나 소련 전문가 스트로브 탤보트가 꼼꼼히 살펴본 뒤 자세한 주석을 덧붙여 출간함으로써 균형을 잡아주었다. 소련 외무장관과 총리를 지낸 몰로토프의 ‘몰로토프는 기억한다’도 기억에만 의존한 것이다. 그러나 전기작가인 펠릭스 추에프가 17년에 걸쳐 무려 140회나 만나 질의응답을 계속한 뒤 한 전문가의 철저한 고증까지 곁들여 만든 작품이어서 역시 내용이 풍부하고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청(淸)의 마지막 황제였고 만저우(滿洲)국 황제였던 비운의 푸이(溥儀)가 중국 공산당의 죄수가 된 뒤 교도소에서 몇 년에 걸쳐 쓴 자술서 역시 그 시대에 밝은 많은 사람의 고증과 교차토론을 거쳐 나온, 말하자면 집단적 집필의 회고록이었다.
최근 논란을 불러일으킨 김영삼 전 대통령의 회고록은, 전직 대통령이, 더구나 자유당정권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가깝게 한국정치의, 특히 민주화운동의 앞장에 섰던 원로의 회고록이란 점에서 관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대통령 퇴임 이후 3년이 채 안 된 시점이어서 좀 이르지 않았나, 숙성의 햇수가 더 길었더라면 보다 더 객관적일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아쉬움이 따른다. 게다가 어떤 자료, 어떤 기록에 입각한 것인지 궁금하다. 대부분 기억이나 관련 인사들의 회고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신뢰성과 공평성에 논란이 따를 수 있다. 출판에 앞서, 한국현대사에 밝은 학자들, 그리고 지난 반세기 역사의 고비고비에 취재를 맡았던 기자들의 집중적인 검토와 반대질문의 과정을 거쳤더라면, 일방적 회고라는 평가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솔직한 토론통해 진상 밝혀야▼
선진국에선 주요 인사의 회고록이 나오면 관련학자들 사이에 뜨거운 토론이 벌어지고 그것을 통해 회고한 내용의 진위 여부와 회고록의 가치가 자리매김된다. 이렇게 볼 때, 정계에서 일던 논란이 슬그머니 멈추었다고 해도 학계에서는 보다 솔직한 토론을 통해 진상을 밝히는 것이 정도다. 어떻든 이번 논란이 우리나라에서 회고록 문화를 선진화시키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본사편집·논설상임고문>h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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