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법]'죽은이들의 변호사' 법의학 실태 점검

  • 입력 2001년 2월 19일 19시 09분


몇해 전 한 젊은 청년이 건물에서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수사 초기 의례적인 자살로 여겨졌던 이 사건은 시체를 부검한 법의학자가 타살의 의혹을 제기하면서 ‘살인사건’으로 반전됐다. 추락사인 경우 뇌의 상처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두개골이 부딪힌 부위와는 반대편에 있어야 하는데도 같은 쪽에 있었던 것. 이는 피해자가 머리를 맞아 사망한 뒤 떠밀렸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경찰은 이를 단서로 수사에 착수해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이처럼 법률의 시행과 적용에 관련된 의학적, 과학적 사항을 연구하고 이를 감정하는 것이 법의학이다. 죽은 자들이 온몸으로 풀어놓는 ‘하소연’에 귀 기울이고 이를 통해 억울함을 풀어주는 열쇠다. 이 때문에 법의학은 인권 옹호와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필수 학문으로까지 평가받는다. 법의학은 형사사건의 사망원인을 밝히는 것 외에도 DNA를 통한 친자 감정, 업무상 재해의 판정 등 일상 생활의 많은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허술한 국내 법의학 실태〓국내 법의학은 제도상의 허점과 부족한 인력 등의 문제 때문에 그 활용과 발전의 ‘재료’가 되는 기본적인 조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7일 무죄가 선고된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의 경우는 검시제도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 경찰은 당시 사건 현장에 부검의가 없는 상태에서 시체의 직장(直腸)온도를 재거나 손톱을 잘라놓는 등 기본적인 처리도 해놓지 않았다. 또 사망시각과 원인을 추정할 사진자료도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신을 화장해버리는 바람에 법의학적 검증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6년을 끌어온 이 사건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법의학적으로 제대로 규명되기만 했다면 그렇게 많은 시간과 인력이 소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시한다. 사건을 심리한 서울고법 형사5부도 17일 증거부족을 이유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이같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법의학자가 30여명에 불과하다. 서울지역 수십개 의과대학에서 법의학과을 가르치는 곳은 고작 4군데. 이런 인력난 때문에 검시관이 현장에 직접 가서 제대로 현장 증거 등을 수집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또 대부분의 부검을 이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 의사에게 의뢰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건현장에 참여하는 외국의 법의학〓미국 등 선진외국에서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검시관이 현장에 직접 출동, 경찰과의 공조를 통해 수사에 참여한다.

미국이나 영국에는 법의관(medical examiner), 혹은 검시관(coroner) 제도가 있어 시신과 관련된 판단과 처리는 모두 이들의 책임하에 이뤄진다. 미국에서는 변사체 발견시 경찰 신고와는 별도로 일단 법의검시사무소에 보고되는 등 법의관의 책임과 권한이 막중하다.

또 인구 270만의 샌디에고에만 8명의 법의학자가 있는 등 주마다 10여명의 법의학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일본도 90여개 의과대학에 법의학 관련학과를 모두 설치하는 등 법의학 육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이한영 법의학과장은 “사건현장은 ‘정보의 보고’인데도 인력 부족 때문에 이를 눈앞에서 놓치는 안타까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법의학에 대한 제도적 경제적 지원이 선행되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치과의사 모녀'살해 쟁점…물온도별 시신 강직정도 달라 정확한 사망시각 판단 어려워▼

17일 서울고법 형사5부(재판장 이종찬·李鍾贊부장판사)에의해 다시 무죄가 선고된 이도행(李都行·39)씨 사건은 법의학적으로 그동안 쟁점이 되어왔던 사건이다.이 사건의 법의학적 쟁점중 주요부분은 다음과 같다.

경찰이 이씨의 아파트 욕조 미지근한 물 속에 엎드린 자세로 발견된 시체를 앞으로 돌려뉘인 것은 사건당일 오전11시반. 당시 가슴 앞부분 등에서 발견됐던 붉은 반점들은 다음날 오른쪽 허벅지 앞부분의 반점 하나를 빼놓고는 다시 등쪽으로 몰려 있었다.

시간에 따라 발견 부위가 변한 반점들이 왜 문제가 됐을까.

시체의 혈액순환이 멈추면 적혈구 등은 중력에 의해 낮은 곳으로 가라앉게 되고 이 과정에서 피가 몰리는 곳은 피부에 암적갈색 반점들, 즉 시반(屍班)이 생기게 된다. 사망 후 4∼5시간이 지난 시체는 시반이 피부에 완전히 달라붙지 않으므로 체위를 돌려놓으면 반점들이 다시 반대편으로 몰리지만 10시간 이상 지난 경우 시반이 완전히 피부에 달라붙어 변화가 없다. 사망 경과시간이 그 중간이라면 절반 정도는 착색되고 나머지 절반은 다시 반대편으로 이동하는 ‘양측성 시반’이 생긴다.

법의학자들은 허벅지의 반점을 시반으로 볼 경우 ‘양측성 시반’이 나타났으므로 살인사건은 이씨가 출근한 7시 이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부는 그것이 사건 당시 저항하는 과정에서 생긴 피멍이라면 사망시각은 7시 이후일 수도 있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사망 후 시체가 굳어지는 시강(屍剛)현상도 논란이 됐다. 감식팀은 당시 시체 전신이 딱딱해져 있었던 점을 근거로 사망 경과시간이 6∼7시간 정도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일부 법의학자들은 따듯한 물 속에서는 시강이 훨씬 빨리 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제한적 증거자료에 대한 엇갈린 해석은 재판이 진행되는 6여년간 계속돼 왔고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시간과 온도의 관계
온도시강이
시작되는 시간
전신강직까지의
시간
20도1시간6시간15분
29도50분4시간10분
37.5도35분2시간35분
41도25분2시간20분

(일본 실용 법의학서 인용)

▼한국 법의학의 영욕…박종철 고문 증명 개가-오판으로 불신 초래도▼

80년대 이후 법의학은 중요사건들을 통해 종종 세인의 관심을 모아 왔다. 때론 묻혀진 진실을 밝혀냈지만 오판(誤判)을 초래하거나 진실에 접근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87년 민주화 운동의 불을 당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대표적인 법의학의 쾌거. 당시 경찰은 “수사관이 책상을 ‘탁’하고 치니 박군이 ‘억’하며 쓰러져 숨졌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국과수 법의학과장이던 황적준 박사는 부검결과를 토대로 박군이 물고문을 받아 질식사했다는 진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 진실은 세상을 바꿨다.

95년 그룹 ‘듀스’의 김성재씨를 살해한 혐의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애인 김모씨는 변호인의 끈질긴 법의학 투쟁 덕분에 무죄를 확정받았다.

항소심 변호인은 사자의 몸에서 검출된 약물이 건강한 성인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는 아니라는 등 국내외 법의학 자료로 검찰에 대한 판사의 ‘합리적 의심’을 증폭시켰던 것.

대표적 오판사례는 92년 김모 경찰관의 애인 살해사건. 검찰은 경찰의 검증내용을 토대로 김씨를 살인범으로 지목했고 1,2심도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진범이 잡혔다. 이로인해 법의학은 온갖 수모와 불신을 받아야 했고 검찰은 공식 ‘반성책자’까지 발간했다.

재미교포와 혼혈 한국인 중 하나가 진범일 수밖에 없었던 97년 ‘이태원 햄버거 가게 살인사건’에서도 법의학은 진실발견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당시 부검의는 피해자 조모씨의 사체에서 발견된 상처의 각도와 위치 등으로 덩치가 큰 재미교포를 범인으로 지목했으나 대법원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확정했다. 혼혈 한국인은 검찰의 재수사 직전 미국으로 도피했다.

98년 12월 발생한 김훈중위 사망사건의 경우 이런 과거에서 만연된 ‘법의학에 대한 불신’이 자살과 타살 논란의 확대에 기여한 측면이 많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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