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예술]아랑은 왜

  • 입력 2001년 2월 16일 19시 55분


◇다시 부활한 16세기 '아랑전설'/김영하 지음/287쪽, 7500원/문학과 지성사

조선 명종 16년, 경상도 밀양 부사의 딸 아랑이 홀연히 실종된다. 그후 새로 부임하는 사또마다 부임 첫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나간다. 담력이 센 이상사란 자가 신임부사를 자청한다. 첫날밤에 아랑의 원혼이 침소에 나타난다. 겁탈에 항거하다 죽임을 당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다음날 큰줄흰나비로 변한 아랑은 한 아전의 상투에 내려앉아 범인을 알려준다. 사또는 그를 극형에 처하고 대밭에 버려진 아랑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러자 더 이상 아랑의 귀신이 나타나지 않았다….

김영하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후 5년만에 내놓은 장편소설은 16세기 아랑전설을 현대적으로 변용시킨 작품이다. 그의 재기가 번뜩이는 것은 전설을 각색해 또 다른 판본의 아랑설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를 소설로 재구성했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새로운 구성과 스타일은 그 전례를 찾기 힘들다.

우선 작품 속의 소설가는 구전되는 아랑전설의 여러 가지 판본을 꼼꼼히 대조해 나간다. 퍼즐을 맞춰가듯 거기서 일치되지 않는 틈을 발견하고 그 간극을 각종 문헌을 통해 메꿔간다. 얼핏 진지한 고증을 거치는 듯하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은 소설. 능청스럽게 ‘조선왕조실록’을 날조하고 ‘정옥낭자전’이란 가상의 책을 끌어들이고 있다.

면밀한 비교를 통해 새로운 아랑전설 판본의 가능성을 모색한 뒤 소설가는 자문한다. ‘당시에 귀신을 믿지 않은 사람이 한 명쯤은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아랑 살해사건의 전모를 밝힐 인물로 의협심이 강한 의금부 낭관 김억균을 등장시켜 탐정의 역할을 맡긴다.

독자는 소설가가 인도하는 아랑전설의 실체에 대한 흥미진진한 지적 추리게임에 동참하게 된다.

소설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전근대적인 귀신담을 현재로 끌어들이면서 전설에 환상적인 요소를 도입한다.

동거녀인 영주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작가 ‘박’이 500년 전 아랑의 귀신을 만난다는 설정이 그것. 영주는 전생에 아랑이었을까? 소설가는 의도적으로 해답을 유예시키고 이야기의 빈틈을 남기면서 현대판 아랑전설을 예고한다.

김영하는 98년 중편소설로 발표했던 원작품을 지난해 인터넷에 연재하면서 추리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지난해 반년간 공력을 들이더니 결국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로 버전을 바꿨다.

김영하의 문제의식은 후기에서 잘 드러난다. “세월이 지나면 아랑전설을 새롭게 쓰는 이 기획을 이어갈 누군가가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그도 결코 이 이야기를 ‘완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옛날 아랑 전설을 만들어 퍼뜨리던 이야기꾼들처럼 나도, 그리고 그도 하나의 징검다리에 불과하니까.”

김영하의 이같은 생각은 한국의 리얼리즘 소설이 탐험하지 못했던 미답지로 떠나려는 출사표는 아닐지. 그는 차기작으로 ‘상큼한’ 연애소설을 구상 중이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