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밀착취재]서경배 (주)태평양 사장

  • 입력 2001년 2월 15일 18시 48분


‘무한 책임주의.’

한국 기업의 대 고객관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용어다. 93년 당시 갓 서른의 나이에 아이디어를 내고 각종 캠페인을 주도한 ¤태평양의 서경배사장.

“그때나 지금이나 고객으로부터 멀어진 기업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88년부터 92년까지 회사 경영이 좋지 않았습니다. 회사의 재도약을 위해 날마다 직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습니다. 고객에 대한 책임에서 재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지요.”

서사장에게 고객은 신앙과 같다. ‘교회에 가면 하나님을 믿듯이 태평양은 고객을 믿는다’는 것. 말만이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96년 영국에서 광우병 파동이 나자 화장품에 들어가는 동물성 재료들을 분석하고 이를 대체할 식물성 재료들을 개발한 일.

연구 결과를 화장품공업협회 등에서 발표해 업계와 공유하기도 했다. 아직도 미국 일본의 일부 화장품들이 동물성 재료를 쓰는데 반해 태평양은 모든 제품에 식물성 재료만 쓴다.

비누에 들어가는 마모제가 눈에 좋지 않다는 보고가 나오자 당장 제품 생산을 중단한 일도 있다. 고객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는 처음부터 철저히 배제한다는 주의다.

조용하고 나직한 목소리지만 경영철학 만큼은 거침없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서사장. 아직 불혹의 나이에도 이르지 않은 젊은 경영자가 어디에서 그처럼 간단치 않은 지혜를 쏟아내는 것일까.

비결은 끊임없는 공부에 있는 듯했다. 그는 21세기 멀티미디어 시대에 ‘촌스럽게도’ 취미가 독서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사장 덕분에 그가 읽은 책은 회사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곤 한다. 지난해에는 ‘바이킹 경영학’을 너도 나도 사는 바람에 서울 용산의 회사 근처 서점에서는 이 책이 동 났다. 회사안에서는 경영학자 골상학자 미술가 등의 강의가 이어진다.

한발 앞선 연구는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힘이 된다. 태평양은 97년 외환위기가 닥치기 전 구조조정과 경영혁신을 시작했다. 섬유유연제 등 만년 3등 제품, 수익이 나지 않는 분야는 과감히 정리했고 회사가 직접 하지 않아도 될 분야는 아웃소싱 체제를 만들어나갔다. 반면 연구개발 제품개발 고객연구 등 핵심 역량은 늘렸다.

“자잘한 분야까지 직접 하다 보면 작은 이익은 얻을 수 있으나 큰 것은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서사장의 얘기. 이 때문에 외환위기때도 태평양은 매출과 순익이 해마다 늘었고 기업들이 현금부족으로 쩔쩔매는 요즘 태평양은 현금 1000억원을 보유하고 있다.

합리적 경영은 노사관계에도 좋은 영향을 주었다. 90년 한달간 대규모 파업을 하는 등 진통을 겪었지만 이후 경영혁신으로 수익이 좋아지면서 근로자들의 경영진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

1945년 부친인 서성환회장이 태평양을 세운지 56년. 국내 화장품업체가 150개, 수입화장품은 300여가지로 늘어나면서 경쟁도 치열해졌다. 수십년간 라면도 맥주도 1위가 바뀌었지만 화장품에서만은 태평양이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서사장은 그러나 이 점에 대해 단호하다. “사람이 태어나면 죽는 것처럼 기업도 언젠가는 망합니다. 직원들에게도 회사가 언제든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다만 어떤 기업이 조금 더 오래 사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태평양은 국내 1위에 만족하지 않고 국제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화장품의 본고장 프랑스에서 향수 롤리타램피카가 지난해 시장 점유율 5위에 올랐다. 중국 선양의 현지법인이 최근 흑자로 전환된데 힘입어 상하이에도 공장을 건설하고 영업조직을 만들 계획이다. 피부과학에 대한 성과를 바탕으로 제약과 바이오원료 사업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신연수기자>ysshi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