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영 버전 2001]변신하는 도이체방크 "코끼리에 날개를"

  • 입력 2001년 2월 11일 18시 27분


올 2월1일 도이체방크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본점에서 2000년 경영성과를 발표하는 연례 기자회견이 열렸다. 대략적인 흑자규모가 알려져 있어 기자들의 질문은 미국 월스트리트와 프랑크푸르트 증시를 중심으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메릴린치 인수설’에 모아졌다. 독일 경제전문지인 ‘매니저 매거진’은 인수설을 구체적으로 보도하기까지 했다.

지난해엔 도이체방크와 미국 JP모건 사이에 모종의 연대설이 나왔지만 사실무근으로 밝혀졌었다. 홍보책임자인 데틀레프 람스돌프 박사는 ‘노 코멘트’로 일관했다. 그러나 질문공세는 도이체방크가 10년간 공들여 온 미국공략 전략을 상징하는 사례였다.

▽미국 월스트리트를 공략하라〓‘영국 모건 그렌펠 인수후 연착륙실패(97년)―미국 뱅커스트러스트 인수(99년)―독일 드레스드너 은행 합병 실패(2001년)―미국 메릴린치 인수 추진설(2001년)’.

독일 최대의 은행 도이체방크를 둘러싸고 지난 3년간 벌어진 일들은 도이체방크의 ‘어제와 내일’을 읽게 한다.

도이체방크는 99년초 자산규모 1560억달러로 미국내 8대 은행이던 뱅커스트러스트(BTC)를 인수했다.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였던 ‘예금받아 대출하는’ 상업은행 기능외에 인수합병, 외환거래, 회사채 주식 등 유가증권발행 업무 등 투자은행업무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미국 영국 중심의 앵글로색슨계가 주도하는 미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BTC가 러시아 채권투자에서 5억달러에 이르는 적자를 낸 뒤 주가가 떨어져 ‘값이 맞았던’ 것도 인수 결정을 앞당겼다.

문제는 ‘독일계 공습’으로 BTC내 최고 두뇌 10여명이 회사를 떠나기로 결정하면서 터졌다. 도이체방크는 곧바로 이들에게 1인당 수백만달러씩 ‘잔류 보너스’를 지급해 가며 이들을 붙잡아 뒀다. 조직 문화를 강조하던 독일 은행이 핵심 인력군(群)이 은행 경영성과를 좌우하는 미국식 셈법을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투자은행의 가치는 최고경영진이 갖춘 마케팅 능력에 달렸다는 오랜 월스트리트의 격언을 다시 확인하는 사례”라고 보도했다.

독일내 3대 상업은행인 드레스드너 은행과의 합병이 지난해 5월 마지막 순간에 불발된 것도 불필요한 사업은 버려야 한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두 은행간 협상의 쟁점은 합병이 성사된 뒤 드레스드너은행의 영국 런던 소재 투자은행인 ‘드레스드너 클라인워트 벤슨’을 팔 것인지 여부였다.

도이체방크측은 드레스드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복 사업부문을 매각하지 못한다면 합병의 이유가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합병 일보 직전에 결렬됐고 주가가 20%나 떨어졌다. 그러나 도이체방크는 “긴 안목에서 보면 주가는 더 오를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코끼리에 날개 달자〓뉴욕과 프랑크푸르트의 금융 관측통들은 도이체방크를 둘러싼 변화를 ‘비대한 코끼리가 군살을 빼며 날개를 다는 작업’으로 평가하고 있다.

수년전 도이체방크 사내잡지에는 직원들에게 “당신의 근무회사를 상징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려보라”는 설문이 실린 적이 있다. 홍보팀으로 돌아온 그림 가운데 상당수가 ‘유난히 살이 오른’ 코끼리였다. 덩치가 크고, 보수적이면서 반응이 느린 코끼리의 속성이 도이체방크에 들어맞는다는 뜻이지만 독일 경제내에서 120년 역사의 도이체방크가 차지하는 막강한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도이체방크는 지난해 1월부터 특별목적회사인 ‘도이체방크(DB) 인베스터’를 만들어 모회사가 보유한 주식을 전량 넘겼다. 도이체방크는 세계 3대 자동차회사인 다임러크라이슬러의 지분 13%를 갖고 있는 등 독일내 제조업체의 지분을 상당량 보유한 주식 부자은행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은행장사로 벌어들이는 수입과 주식배당 및 주가상승 등 주식보유에 따른 수익을 엄격히 구분해 경영 성과를 드러내 보인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결정이다.

도이체방크 지점 네트워크(소매금융업무)와 폰뱅킹을 담당하는 자회사 ‘방크 24’를 합쳐서 ‘도이체 방크 24’라는 새 자회사를 출범시켰다. 보수적인 소매금융업무와 공격적인 투자은행업무가 섞여있을 때 생길 수 있는 문화 충돌에 따른 효율저하를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본점직원 3분의 1만 남겨라〓도이체방크 본점 직원에게 지난해 5월 폭탄선언이 떨어졌다. 롤프 브로이어 총재가 기자회견에서 “프랑크푸르트 본점 직원 가운데 3분의 2를 자르거나, 지점으로 보내겠다”고 발표했다. 직원들은 “우리가 세계 제1의 은행이 맞느냐”며 얼굴만 쳐다봤다고 현지 언론은 보도했다. 당시는 도이체방크가 BTC를 인수하며 미국 시티은행을 제치고 자산규모 기준 세계 최대은행으로 떠오른지 불과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결국 본점 직원수는 2000명에서 700명으로 줄었다. 물론 해고된 수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보수’의 대명사인 도이체방크의 자기 변신을 재촉했다. 세계 1위라는 외형에 도취해 미래를 준비하기를 게을리해 선 안된다는 논리였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롤프 브로이어 도이체방크 총재가 있다.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주가를 떠받칠 요인은 실적과 변하고 있다는 확신 뿐”이라는 브로이어총재의 96년 취임일성은 많은 것을 예고했다.

브로이어 총재가 금융계의 이단아로 통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보수적인 독일금융계에서 주주가치, 배당률, 글로벌 플레이어라는 다분히 미국적인 표현을 강조하는 미국식 금융정신을 숭배하는 최고 경영자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 탓이다.

일반 고객을 상대로 한 소매금융은 수익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해 BTC 인수이후 인수합병(M&A)중개 및 대기업 상대의 도매금융에 주력해 왔다.

“인터넷이 다른 산업보다 금융서비스 분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아메리카온라인(AOL) 유럽과 제휴해 휴대전화를 이용한 홈뱅킹과 증권거래 서비스 제공을 주도해 왔다.

도이체방크의 앞날은 BTC 인수 3년을 맡는 올해 어떤 경영 성과가 나올지에 달려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보도했다.

▽문화충돌 극복해야〓도이체방크가 미국 법인 강화라는 점진적인 변화 대신 다른 메이저 은행인 BTC을 통째로 사들인 ‘결단’을 내리긴 했지만 변수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문화 충돌’. 독일계 은행의 보수적 영업관행, 즉 관료적이고 때로 국익을 고려하는 조심성까지 보이는 기업문화와 미국 은행의 공격적 영업스타일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도이치 모건 그렌펠(DMG)’의 악몽이 재연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모건 그렌펠은 도이체방크가 89년 사들인 영국계 투자은행. 도이체방크는 모건 그렌펠을 인수한 뒤 수십억달러를 들여 월스트리트의 초일류 스타들을 스카우트하고 영업망을 구축했지만 문화충돌을 극복하지 못했다.

몇몇 호사가들은 “월스트리트가 유대계 자본이 지배한 데다 로이터, AP통신, 블룸버그 등 금융전문 매체들도 모두 유대계 자본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는 점에서 도이체방크의 미국시장 진출은 버거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고 전망하기도 한다.

<김승련기자>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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