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현대판 로빈슨 크루소<캐스트 어웨이>

  • 입력 2001년 1월 29일 18시 48분


망망대해에 떠 있는 무인도.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혼자 살아남은 남자. 그의 품엔 그 흔한 주머니칼이나 라이터 하나 없다. 다만 해변으로 떠내려온 항공소포에서 건져낸 스케이트와 망사드레스, 배구공만 남겨졌을 뿐. 아, 그리고 하나 더. 바쁘다는 핑계로 치과에 가기를 게을리 했다가 붙어온 치통까지.

‘포레스트 검프’의 제작진이 다시 뭉친 ‘캐스트 어웨이’(Cast Away)의 전반부는 분명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다. 하지만 21세기의 영화는 18세기 소설보다 좀 더 현실적이다. 항공택배회사 페덱스의 임원으로 현대문명의 온갖 이기에 익숙한 척 놀랜드(톰 행크스)에게 닥친 재난의 정도는 18세기 선원의 그것과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선 불을 지피는 일부터가 끔찍한 악몽이다. 들은 풍월은 있어서 마른 나뭇가지를 밤새 비벼대지만 불 피우기는 고사하고 손바닥의 상처만 남는다. 영화는 그가 불씨를 지피는 방법을 터득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며 머리로 얻은 지식이 현실과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준다.

열대의 섬에선 지천으로 널려있는 코코넛 밀크가 실은 천연 설사약이란 점도 깨우쳐준다.이런 생생한 묘사는 시나리오 작가 윌리엄 브로일즈가 조그만 섬에서 격리생활을 통해 직접 체험하며 확인한 것들이다.

이 때쯤 ‘저건 도대체 뭐에 쓰나’했던 소품들이 기상천외하게 활용된다. 망사드레스는 그물로 바뀌고 스케이트는 거울과 도끼날, 그리고 치과용 메스로까지 둔갑한다. 그리고 스포츠전문업체 윌슨사의 상표가 뚜렷한 배구공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2년 연속 수상한 톰 행크스로부터 가장 애틋한 연기를 끌어내는 상대역이 된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25년 세월은 현대인에겐 4년의 세월과 맞먹는 것일까. 척은 사랑했던 여인 켈리(헬렌 헌트)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건 모험 끝에 문명사회로 돌아온다.

영화의 3분의 1쯤 되는 후반부는 알프레드 테니슨의 서사시 ‘이노크 아든’에 가깝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척을 기다리는 것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돼 아기까지 낳고 사는 켈리다. 이쯤에서 ‘난파되다’라는 뜻의 영화 제목(캐스트 어웨이)도 ‘이노크 아든’의 시귀, ‘Enoch, the poor man, was cast away and lost’에서 따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온갖 특수효과로 ‘로빈슨 크루소’의 사실주의를 추격한 할리우드영화는 그러나 19세기 낭만주의 작품이 지닌 감동까지 쫓기엔 역부족이다.

아내의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귀환을 알리지 않은 채 쓸쓸히 죽어가는 이노크 아든과 달리 척은 끝내 켈리를 만나 눈물어린 사랑고백을 듣고 나서야 돌아선다. 그러나 이 장면은 2시간23분의 상영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이 영화를 촬영한 무인도는 피지섬 북부 마마누카군도에 속한 모누 리키섬으로 썰물 때 두시간 반이면 섬주변을 걸어서 한바퀴 돌 수 있을 만큼 작은 섬이다. 3일 개봉. 12세이상 관람가.

<권재현기자>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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