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모딜리아니, 열정의 보엠

  • 입력 2001년 1월 19일 18시 46분


◇모딜리아니, 열정의 보엠 앙드레 살몽 지음 강경 옮김

301쪽 1만5000원 다빈치

천재란 수식어가 붙은 예술가들의 삶을 짚어 보면 대체로 공통점이 있으니 정상적이지 못한 괴팍함, 세속과 타협하지 않는 고집, 게으르지만 자기 작품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 조울증에 따른 편집광적인 혈기, 열정의 분출로 소진된 짧은 수명을 연상시킨다. 그 범주에 들 예술가가 동서고금에 어디 한둘이랴. 그 중 화가 모딜리아니(1884∼1920)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전쟁 뒤끝의 궁핍했던 시절,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모딜리아니의 마지막 연인 잔느 에뷔테른의 초상화가 신문의 희미한 동판그림으로 실린 것을 보았고, 그의 비극적인 짧은 생애를 알고 나서 철없이 그를 연모하며 화가를 꿈꾸었던 시절이 아득하게 돌아 보인다.

최근에 출간된 이 책에서 그의 비극적인 삶과, 고뇌와 열정이 순열하게 타오르는 도판 화보를 보자 첫 순정이 다시 뭉클하게 솟아오른다. 그 동안 몇 차례 번역된 모딜리아니의 다른 전기들에 비해 이 책은, 마치 모딜리아니와 동시대 파리를 함께 걷고 그와 함께 술집거리를 배회하는 듯한 친절함이 우선 마음에 와 닿는다.

모딜리아니, 피카소, 아폴리네르 등과 친분이 두터웠고 스스로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저자가 한 천재의 예술과 삶을 소설로 보여주듯 냉정하면서도 따뜻하게, 그러면서 객관적이면서도 정감있게 접근해간다. 20세기 초 파리의 몽마르트나 몽파르나스 거리를 누볐던 모딜리아니와 그 주변 예술가들의 생활을 미화나 과장 없이 흥미롭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항구도시 리보르노에서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모딜리아니가 화가로 입신하기 위해 청운의 뜻을 품고 파리에 입성한 것은 22세 때였다. 그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피카소를 알아보고 접근해 그의 권유로 ‘썩어가는 재료, 나무 끝, 낡은 판자, 철조망, 그런 것들을 전부 끄집어 모아 만든 오두막집과 판자집들로 꽉 들어찬 넓은 공간’(51쪽) 몽마르트에 정착해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20세기초 당시 파리야말로 ‘저 위대한 창조의 시대, 피카소가 말했던 대로 화가와 시인이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던’(120쪽) 황금기였기에, 그는 금방 퇴폐한 예술가의 무절제한 생활에 함몰된다. 에트랑제로 미남인 그에게 뭇 여자들이 따랐고 그녀들은 스스로 옷을 벗어 보수 없는 모델이 되어주었다.

모딜리아니가 몽파르나스에서 얻은 최초의 평판이란, 불쌍하게도 ‘괴짜’라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어떤 날 밤에는 술에 취해 미친 듯이 화를 내는 주정뱅이가 되었으며, 또 어떤 날 밤에는 격노해서 자기의 가장 아름다운 데생을 갈갈이 찢어버리곤 했다. 스스로가 지닌 용기에서 격려를 받으며 살던 몇몇 영웅들만이 모딜리아니의 위대한 장래를 느끼고 있었다.(177쪽)

모딜리아니가 그의 미술의 본령인 초상화와 나체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는 1904년부터였다. 1920년 36세에 결핵성 뇌막염으로 사망했으니 활동기간은 고작 16년에 불과하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와 조소는 누구나 쉽게 그 개성을 집어낼 수 있으니 긴 얼굴, 긴 코, 긴 목, 긴 몸으로 특징지어진다. 저자는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두고 “그의 비극적인 생애를 보고서 어떤 이들은 그에게 고뇌의 화가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확실히 사실주의에 지지 않을 만큼 치밀하면서도 관능적인 한편, 깊은 종교성이 풍기는 그의 작품을 보면 나는 그를 정화(淨化)의 화가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247쪽)고 말한다.

고흐처럼 살아 생전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불행한 알콜중독자 모딜리아니는 피를 토하던 끝에 자선병원에서 “이탈리아! …카라 이탈리아(그리운 이탈리아)!”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의 삶과 죽음의 과정은 묘하게도 우리의 천재 이상(李箱)을 연상시킨다.

모딜리아니의 생애를 떠올리면 실에 바늘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함께했던 그의 마지막 연인 잔느 에뷔테른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딜리아니의 둘째애를 밴 만삭의 몸으로 시체안치소로 달려간 잔느는 화가와 모델로서 만나 3년 동안 격렬하게 사랑했던 사람의 싸늘한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 오래 동안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이틀 뒤 6층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함으로써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하는 영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러고보니 모딜리아니의 사망일이 우리의 설날인 1월 24일이다. 그의 82주기가 며칠 남지 않았다.

사족을 붙인다면 이 책은 저자가 모딜리아니를 옆에서 지켜본 덕분에 격정의 삶은 잘 형상화했으나 작품의 내면세계는 심도있게파헤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김원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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