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책 사람 세상]논술고사는 '실험실의 청개구리'

  • 입력 2001년 1월 5일 19시 11분


대입 수능시험이 너무 쉽게 출제된 탓에 변별력이 떨어졌다. 이에 따라 대학별 논술고사가 당락을 결정짓는 중요한 변수의 하나로 대두되었다. 고액 논술과외마저 없지 않다고 한다. 단기간에 논술의 무슨 비책 같은 것을 전수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비책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수험생과 학부모의 근심을 파고드는 얄팍한 상술에 불과하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틈타 고가에 부적을 파는 극소수 그릇된 역술인의 행태와 비슷하다.

논술고사 시행 이후 논술산업이 제법 성황을 이루고 있다. 논술 대비 강의를 하는 학원은 물론이거니와, 논술 대비용 도서를 펴내는 출판사, 이른바 첨삭지도까지 하는 논술 전문 업체 등으로 이루어진 제법 유망한 산업이다.

명색이 산업이다 보니 고용창출 효과를 지니는 것은 분명하고, 결국 GNP 성장에 한 몫 하는 셈이니 크게 탓할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나 논술고사 시행의 근본 취지가 논술산업의 성장에 있지는 않을 것이 틀림없다고 본다면, 근본 취지를 되새기는 일이 중요하다. 주어진 주제를 놓고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타당한 근거에 입각해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글로 표현하는 능력을 평가한다는 것이 근본 취지인 것 같다. 취지가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런 취지는 결국 다독, 다작, 다상량(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한다)이라는 만고불변의 비책을 학생들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교육 현실은 많이 외우고, 많이 풀고, 잘 찍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니 문제다.

특히 다독의 측면에서, 중고교 및 공공 도서관의 도서구입 예산과 관리 실태가 청소년들의 다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수준인지 의문이다. 학교 도서관이 과제물 준비에서부터 즐기기 위한 독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정보수요를 충족시켜 줄 수 없다면, 논술고사는 좋은 취지와는 상관없이 논술산업의 성장에만 기여할 수밖에 없다.

실험실이 과학교육의 중심지가 되어야 마땅하듯이, 인문교육의 중심지는 역시 학교의 도서관이어야 한다. 전문성을 갖춘 사서 교사의 지도가 있어야 함은 물론, 다양한 분야의 고전과 신간을 포함한 충실한 도서 자료를 갖추어야 한다.

물론 일부 뜻 있는 교사들이 학교 도서관 개혁에 나서고 있지만, 일부의 뜻과 노력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현재의 논술고사는 깊은 바다 한 가운데 수영 못하는 사람을 빠뜨려 놓고 그들의 수영 실력을 평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래저래 괴롭기만 한 우리의 청소년들을 제발 깊은 바다로 무작정 내몰지 말자. 그들에게 최소한 제대로 된 도서관을 마련해 주자. 평가는 그 다음 일이다.

(출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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