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良臣(양신)

  • 입력 2000년 12월 17일 18시 36분


良 臣(양신)

麵―국수 면 街―길거리 가 斬―목벨 참

赦―용서할 사 誅―목벨 주 戮―죽일 륙

우리나라 최고의 帝王은 누구를 꼽을까? 똑 같은 질문을 중국 사람들에게 하면 거침없이 말할 것이다. 漢武帝와 唐太宗. 그래서 그들은 ‘中國’도 즐겨 漢唐 두 자를 사용하여 표현하곤 한다. 우리말에 漢字, 漢學, 漢詩, 唐樂, 唐麵(당면), 唐黃(성냥의 옛이름)이 있고, 華僑들은 자신들을 唐人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차이나타운은 모두 ‘唐人街’다.

묘하게도 우리에게는 그리 반갑지 않은 帝王들이지만 오늘은 唐太宗(李世民) 이야기를 좀 하겠다. 조선시대의 太宗과는 廟號(묘호)도 같고 帝位에 등극했던 과정이며 英明한 통치가 어쩌면 그렇게 똑 같을 수가 있는가.

그 역시 ‘王子의 亂’을 통해 형과 아우를 죽이고 병석의 아버지(高祖 李淵)를 협박하여 帝位를 찬탈했지만 타고난 자질은 단연 뛰어났다. 사실 아버지를 부추겨 隋(수)나라를 뒤엎은 것도 그의 策略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패기만만하였으며 聰氣(총기)가 넘쳐 흘렀다. 그래서 靑史에 길이 남을 수 있는 英明君主를 꿈꾸었다.

여기에다 그는 사람을 보는 눈도 가지고 있었다. 名君엔 賢臣이 들끓는 법. 房玄齡(방현령)과 杜如晦(두여회)가 기초를 닦자 魏徵(위징)이 諫官이 되어 인도했다. 위징은 본디 太子이자 政敵이었던 형 李建成의 參謀였다. 唐太宗은 응당 그를 斬殺(참살)했어야 함에도 불러다 썼다. 아니 형의 모든 參謀를 赦免(사면)했다. 그는 그만큼 그릇이 큰 인물이었다.

처음 唐太宗이 그를 불렀을 때 群臣들은 식은 땀을 닦아 내렸다. 唐太宗이 물었다. “그대는 왜 우리 兄弟들을 이간질했는가?” 魏徵은 당당했다. “太子께서 저의 諫言을 들었던들 지금과 같은 慘劇(참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唐太宗은 깜짝 놀랐다. “그대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저는 良臣이 되고 싶지 忠臣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唐太宗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舜임금 때의 后稷(후직·농무장관)과 契(설·내무장관), 皐陶(고요·법무장관)는 良臣이요, 關龍逢(夏桀 때의 諫臣)과 比干(商紂 때의 諫臣)은 忠臣입니다.” “그것이 뭐가 다른데?” “良臣은 國君을 尊貴하게 하고 國祚를 萬代에 전하지만 忠臣은 誅戮(주륙)을 당함으로써 國君을 罪惡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며 國祚 또한 保全하지 못하니 天壤之差입니다.” 과연 그는 唐太宗의 良臣으로서 유명한 ‘貞觀之治’를 이루는데 殊勳(수훈)을 세운다.

鄭 錫 元(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email.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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