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홍/미국의 민주주의

  • 입력 2000년 11월 16일 18시 39분


미국 대통령선거가 끝난 지 열흘이 지났는데도 당선자를 확정짓지 못한 가운데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와 회의가 엇갈리고 있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그런 개표시비가 십중팔구 폭력사건으로 얼룩졌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반해 다른 일각에서는 미국의 민주정치에 티가 생겼다는 견해도 나온다. 초기에는 개표실수 정도로 알려져 미국의 민주주의 자체를 거론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흑인들이 투표방해를 받았다는 지적이 뉴욕타임스지 칼럼에 등장하면서 ‘부정선거’냄새까지 풍겨났다.

▷또 개표에서 유권자들이 어느 후보를 지지했느냐는 진의보다도 컴퓨터가 어떻게 판독해 냈느냐는 것이 더 중시될 뻔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연로한 유권자가 기표용지에 구멍을 완전히 뚫지 못한 탓에 컴퓨터에 의해 기권표로 읽힌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런 ‘투표진의’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 수(手)작업에 의한 재검표다. 투개표에 컴퓨터가 도입되는 전자민주주의가 어떤 약점을 안고 있는지 보여주는 경험적 사건이다.

▷양측 후보진영이 한 차례씩 소송을 냈지만 앨 고어측은 수작업 재검표를 계속하도록 하는 판결을 받았는가 하면 조지 W 부시측이 요구한 재검표 시한도 받아들여져 법적으로는 무승부인 상태다. 투개표 결과를 법정공방으로 가져가는 것에 대해 미 유력언론들은 대부분 비판적이다. 그래서인지 고어 후보는 15일 부시 후보에게 회동할 것을 전격 제의했다. 이것으로 미국 대통령선거의 투개표를 둘러싼 논란이 이제 여론전에 돌입한 것 같다.

▷공정성으로 권위있는 영국 BBC방송은 “양측 모두 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데 고심하고 있다”고 여론전 양상을 부각시켰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여론정치라고 할 만큼 대중적 발언과 토의에서의 기세가 중요하며 어느쪽이 설득력있는 커먼센스(상식)에 더 부합하느냐로 승패가 가려지는 일이 많다. 여기서 여론주도층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미국의 시민대중은 여론주도층의 의견을 추수(追隨·conformity)하는 성향이 강하다고 본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알렉시스 토크빌의 통찰력이 아직도 유효할지 주목된다.

<김재홍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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