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교수채용 '순혈주의' 여전

  • 입력 2000년 11월 8일 18시 58분


‘서울대 출신은 0점, 후배는 30점.’(지방대출신 교수의 채점표)

‘후배는 30점, 지방대 출신은 5점.’(서울대출신 교수의 채점표)

지난 여름 교수채용을 위해 공개강좌를 실시한 지방 국립대의 한 학과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서울대 출신과 그 대학 출신이 교수진의 절반씩 차지하고 있는 이 학과의 교수모집에 공교롭게도 두 대학 출신 응시자가 최종단계까지 올라왔던 것.

한 사람의 공개강좌를 두고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어처구니없는 사태 끝에 대학본부는 채용 자체를 보류했다. 이는 우리 학문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순혈(純血)주의의 폐단을 보여주는 작은 예에 불과하다.

주요대학의 모교출신 교수비율
대학모교출신
교수비율
주요 단과대학 모교출신 교수비율
서울대95.1%의대(100%) 치대(98%) 법대(97%)
연세대79.2%의대(84.8%) 경법대(94%)
고려대65.7%법대(87.5%) 자연자원대(84.6%) 인문대(81.8%)
이화여대45.8%간호대(100%) 가정대(85.7%)
한양대45.0%공학대(61.6%) 의대(60.3%)
서강대38.2%인문사회대(42.6%)
성균관대25.4%동양학부(86.7%) 약학부(82.4%)
숙명여대22.3%생활과학대(61.9%) 약대(53.8%)
부산대48.0%의대(90%) 약대(86%)
동아대26.0%생명자원과학대(59%) 법대(44%)

교육부는 교육공무원 관계법령을 개정해 지난해 9월30일 이후 교수채용 때 ‘특정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자’가 3분의 2를 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 만연한 패거리문화와 온정주의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법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우리 대학과 학문 풍토에 뿌리깊은 순혈주의의 실태와 해결방안을 알아본다.

▽‘공적(公的)관계의 사적(私的)전환’〓“교수회의는 한마디로 선후배 모임이죠. 오죽하면 조교수는 선배교수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조교’라는 농담까지 나오겠어요.”(경북지역 한 대학 조교수)

“선배교수의 이론에 반론을 제기하기란 참 힘들어요. 개인적으로 은사이다 보니….”(서울대 한 전임강사)

“원로교수가 어느 제자를 택하느냐가 가장 중요하죠. 눈 밖에 나면 교수는 못 된다고 보면 돼요.”(서울대 출신 강사)

이제 막 본격적인 학문의 길에 접어드는 소장학자들은 ‘대학 내의 패거리문화’를 과감히 지적했다. “순혈주의는 제자나 후배를 채용해 자기 권위에 대한 도전을 막고 정년까지 보장받으려는 이기주의의 발로”라는 것. 여기서 ‘견제와 균형을 통한 학문의 질적 도약’이라는 명제는 설 땅이 없다.

이같은 점을 인식한 교육부는 ‘실력 있는 사람이 임용되지 못할 역불공정의 폐단’을 일부 염려하면서도 특정대학 출신의 채용을 제한하는 쿼터제를 도입하기에 이른 것. 그러나 제도 시행 1년이 지난 지금껏 ‘내 사람 심기의 은밀한 메커니즘’은 여전하다.

▽실태〓‘94.7%→95.1%, 80.8%→79.2%, 61.1%→65.7%.’

순서대로 올해 국정감사에서 거론됐던 지난해와 올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의 본교 출신 교수비율 추이다. 쿼터제 시행 전후에 별 차이가 없다.

심지어 서울대는 올해 임용자 36명 가운데 단 한 명만 타교 출신이었고 법 시행 직전 이례적으로 3명씩 무더기로 채용한 학과도 있다. 특히 법대 의대 치대 등은 이런 경향이 더욱 심각해 거의 교수 전원이 ‘동문’이다.

다른 대학들도 속사정은 비슷하다. 특정학교 출신이 자리잡고 여타 대학 출신은 발도 못 붙이게 하는 사례가 많은 것. 전북지역 한 사립대 교수는 “학교에 따라 그 대학 또는 지역고교 출신이 교수진을 장악해 서울출신 교수들과 갈등을 빚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털어놨다.

▽외국의 경우〓미국 유럽 등에선 이같은 사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순혈주의를 연구의 창의성을 말살하고 학문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근친교배’로 보기 때문.

때문에 미국 주요 대학들은 본교출신 교수 비율이 많아야 10%대다. 하버드대의 경우 1910년대 전체 교수의 70% 이상이 동문이었으나 그 뒤 계속 본교출신 채용을 줄여 현재 10%대에 불과하고 스탠퍼드대의 경우 모교 학사출신이 없다시피 하다.

▽해결방안은 없나〓학계에서는 지난해 교육공무원법 개정에 처벌조항이 수반되지 않은 점을 안타까워한다. 국민대 김동훈(金東勳·법대)교수는 “순혈주의 문제를 학자들 양심에 맡길 경우 영원히 해결할 수 없다”면서 “위반대학에 ‘정원 동결’ ‘지원금 삭감’ 등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 박사과정을 막 마친 경우 일정기간 다른 대학을 거친 뒤에야 모교에 지원할 수 있게 하는 ‘본교 초임(初任) 제한’을 주장하는 이도 많다. 이와 관련해 교육부 관계자는 “순혈주의의 폐해에 공감하며 쿼터제 위반 대학에 ‘재정적 제재’를 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그러나 ‘본교 초임 제한’은 위헌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이헌진기자>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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