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보의 옛날신문읽기]친구 누나 혼자 잠자고 있었네

  • 입력 2000년 10월 27일 18시 51분


「낙서는 한마디로 발산과 긴장감 뒤에 오는 오손행위의 쾌감으로 충동되는 야성철학이다.」

미국의 낙서 전문가 노튼 마크리지라는 사람이 남긴 말이랍니다.

어릴 때 한번 쯤 남의 집 벽에 낙서를 해보신 분은 알겠지만, 과연 낙서는 낙서를 하는 순간 묘한 쾌감을 맛보게 해주지요.

동네 꼬마들은 그 무의식적 배설욕망을 참지 못해 오늘도 어느 골목 담벼락 앞에 가슴 두근거리며 서있을 겁니다.

황지우의 시 한편이 생각나는군요. 친구네 집에 놀러갔는데, 친구는 없고, 친구 누나 혼자 빈 방에서 낮잠자고 있었는데 어쩌구.... 하는, `화장실 낙서 불후의 명작'을 모티프로 한 시였지요.

네, 어쨌거나 낙서는 연구해볼 만한 대상인 것입니다. 국내에서도 70년대 중반 일단의 교수님들이 대학생들의 낙서를 연구해보자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더군요.

경향신문 75년 6월21일자 `낙서에 비친 캠퍼스 성향'이라는 기사를 보면 그 내막을 알 수 있습니다.

< (전략) 낙서행위적 성향이 짙다는 대학생들은 어떤 낙서로 그들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을까.

연세대학교 반피득 교수와 정우현 선생의 「낙서분석에 나타난 캠퍼스의 성향」(연세 상담연구지)에 비친 대학생들의 낙서 양태를 보면. (중략)

모아진 낙서는 분류 결과 「삶」 「죽음」 「신앙」 「풍자」 「장기」등 모두 21개의 카테고리 속에 표현된 것이었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전체의 17.1%를 차지하기도 했다.

분류된 낙서는 「사랑」 「연정」 「성(SEX」) 「여성」 「결혼」 「춤」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 15.8%로 톱을 차지했고 그 다음이 「시」 「시조」「콩트」 「음악」등으로 14.8%의 순. (중략) >

사실 기사는 뒷부분이 더 재밌습니다. `분석 및 평가'라는 소제목이 붙은 부분이지요.

수집한 낙서를 `전문교수 8명으로 구성된 낙서평가 위원회를 구성, 분석'했대요. 교수님 별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홍응선 교수 : 사랑, 연정의 높은 통계는 학생의 연령상 당연하다. 대화실에 앉아 있을 당시의 환경도 작용되므로 이런 낙서가 심각하게 취급될 가치있는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반피득 교수 : 무의식적인 표현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오형석 교수 : 특히 높은 표현도를 보인 「사랑」등은 관심을 크게 갖게 하는 문제다.

이규호 교수 : 낙서장을 귀하게 본다. 수필이나 서신 등과 같이 형식이 갖추어진 것들보다 마음에 맺혀있는 진실이 표현될 수 있었고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러면 옛날 대학생들은 과연 어떤 낙서를 했을까요? 신문에서 몇편 인용하겠습니다.

「남자는 여자의 첫사랑을 구하고 여자는 남자의 끝사랑을 구한다」

「태초에 섹스가 있었느니라」

「다정-인정 애정 무정 우정 비정 밀정 감정 진정」

「사랑이란 한밤중에 심부름을 시키면 가지 않지만 데이트 약속에는 가는 것」

「연애는 멋있는 여자, 결혼은 정숙한 여자」

「금연이란 연애금지란 뜻이니라」

요즘 이런 식의 농담을 하면 듣는 사람이 썰렁하다고 구박할지 모르지만, 소박하지요?

늘보(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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