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교수의 법과 영화사이]젊은이의 양지

  • 입력 2000년 10월 26일 10시 49분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1951)▼

출연: Montgomery Clift. Elizabeth Taylor, Selly Winters

감독: George Stevens ( 오스카상 수상)

젊은이에게는 양지가 있다. 젊음 그 자체가 양지인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젊음의 양지에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검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현대 한국사를 쓴 미국인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 교수는 태양을 향한 20세기 여정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나라라고 했다. (Korea's Place in the Sun, 1997) 그가 '태양론'의 개정판을 쓰게되면 아마도 거대한 흑점이 태양 빛을 가렸던 나라라고 토를 달지 모른다. 반세기 전의 미국영화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는 태양을 사랑하는 철없는 아이들의 꿈과 좌절을 그린 수작이다.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명작 『아메리카의 비극』(An American Tragedy,1925)을 영상으로 재구성한 이 영화는 원작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작품이다.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두 청춘배우의 연기와 무더기 오스카상이 빛나는 이 작품의 외형적 줄거리는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다. 무지와 가난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청년이 청춘의 덫에 걸려 파멸을 맞는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간단한 이야기 뒤에 심각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치정살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원작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조지의 비극은 아메리카 전체의 비극이다.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잉태된 태양을 향한 꿈의 여정의 이면에 길게 드리워진 어두운 악마의 그림자를 주목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미국인의 장미 빛 미래에 대한 심각한 경고를 담고있다. 윤리와 도덕을 밀쳐두고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조지의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도덕적 마키아벨리즘은 한동안 성공하는 듯하나 최종승리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윤리를 결한 헛된 꿈의 종착역은 세속적 영락 아니면 도덕적 파탄이다. 양지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려는 시도가 좌절되고 그 좌절의 원인은 분수 모르게 태양을 탐한 이카로스의 무모한 비상이었다는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고속도로에 세운 대형 간판이 보인다. 간판 속의 젊은 여자의 모습이 고혹적이다. 첫 장면에서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내용이 암시된다. 열심히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려고 허우적거리는 젊은 청년은 간신히 고물 짐차를 얻어 탄다. 유리창이 박살이 난 차의 천장에 트렁크를 던져 올린다. 운전자도, 호의동승(好意同乘)하는 승객도 신분의 동류임을 확인하고 편안한 여행을 한다. 그러나 짐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조지 이스트만의 불안은 계속된다. 그 불안의 원인은 자신이 속한 신분과 꿈꾸는 신분과의 사이의 거리이다. 조지는 '이스트만' 회사를 찾고, 반갑게 맞이하는 사장의 집에도 초청된다. 사장은 친척조카뻘 된다는 사실만으로 조지에게 일자리를 준 것이다. 실인즉 시카고의 호텔에서 벨 보이 노릇을 하고 있던 조지를 불러들인 것도 바로 그였다. 그의 말대로 라면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으나 패기와 야심에 찬, 그래서 장래의 희망이 보이는 청년이라는 것이다. 'Eastman'이란 성을 가진 사내에게는 장래가 있다는 사장 자신도 분명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자수성가일 것이다.

사장은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아들에게 조지의 일자리를 챙겨주라고 지시한다. 아들은 조지를 작업현장의 어셈블리 라인에 배치하면서 준엄한 근무수칙을 통고한다. 이 작업장의 종업원은 90퍼센트 이상이 여자이므로 특히 처신에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여공과의 사적 교제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수칙을 무시하고 조지는 같은 어셈블리조의 여공 알리스를 유혹한다. 사장의 친척이라는 위치 에너지가 은근히 작용하여 알리스를 쉽게 꼬여내고 마침내 잠자리를 나눈다.

어느 날 생산 현장을 순시하다 조지를 발견한 사장은 즉시 그를 승진시켜 사무실 근무를 명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집에서 열릴 파티에 초청한다. 작업장에서 사무실로 자리 옮겨 러닝 셔츠 대신 넥타이를 매게된 조지는 알리스의 품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자신을 확인하면서 갈등을 일으킨다. 파티에 초청 받은 날은 공교롭게도 바로 조지 자신의 생일이다. 그 날 알리스의 아파트에서 생일을 축하하는 조촐한 파티가 약속되어 있다.

알리스의 불만을 무시하고 조지는 "상류사회의 처녀들이 운집하는" 파티 장에 간다. 그곳에서 안젤라 비커스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대면함으로써 조지의 비극이 시작된다. 눈부신 미모에다 모범적인 가정환경에서 쌓은 교양, 게다가 발랄한 언행이 튀는 안젤라의 마력 앞에 조지는 무력하다. 취직이 결정되던 그날 사장 집에서 스쳐가던 그녀의 모습을 훔쳐본 이래로 조지는 이미 안젤라에 대한 연모의 정을 키워오던 터이다. 신문을 통해 보도되는 상류사회의 동정 란에서 안젤라 집안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객쩍게 혼자 당구실에서 능숙한 솜씨로 '스리 쿠션 포켓볼'을 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감탄사를 발하는 안젤라, (60년, 70년 한국의 고급 당구장에 성화(聖畵)처럼 걸려 있던 바로 그 장면이다.) 계속 묘기를 보여달라는 주문에 자세가 흔들리는 조지,

"내가 신경 쓰이나요?"

"당신의 기사를 읽었어요. 일본에 갔던 대요." "

"또 무슨 내용이었어요 ?"

"그저 그런 흔한 이야기였어요."

"당신은 흔치 않은 사람(unusual) 같아요."

이미 흔한 사랑으로 인한 흔치 않은 파멸의 불씨는 점화되고 있었다. 알리스가 임신했다. 낙태가 불가능에 가깝던 시절이다. 두 사람의 고통은 가중된다. 알리스는 결혼을, 조지는 도피를 열망한다. 안젤라의 흡입력에 조지는 급속하게 빨려 들어간다. 앨리스는 결혼을 졸라대고 조지는 판단력이 흐린 강박상태에서 그녀를 죽일 생각을 품는다. 그리하여 앨리스가 헤엄을 못 친다는 사실을 알면서 보트놀이에 데리고 간다. 그러나 정작 망설임 끝에 살해를 포기하였을 때 알리스의 돌출적인 행동이 일고 그 때문에 보트가 전복된다. 무의식중에 현장에서 도망친 조지는 체포되고 지극히 불리한 상황증거를 근거로 일급살인죄의 유죄판결을 받고 전기의자로 향해 걸어간다. 조지 나름대로의 항변이 있지만 성의 있게 들어줄 법의 귀가 없다. 원작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조지의 비극은 아메리카 전체의 비극이다. 법의 관점에서 작가가 제기하는 주장은 인간의 범죄는 자유로운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이 범인으로 내본 환경과 사회적 조건, 이러한 여건에서 배태되어 우발적으로 폭발하는 충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조지로 하여금 "범인으로 내몬" 조건과 상황을 경청할 사람이 없다. 선거 직을 꿈꾸는 검사는 대중의 정서에 영합하여 중형을 구형하고 탁월한 심문기술로 조지의 신빙성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던 조지는 배가 전복되던 그 순간 알리스 대신 안젤라를 생각한 것은 마음속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는 신부의 논리를 받아들이고 면회 온 안젤라에게도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항상 당신을 생각했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조지."

마지막 키스 끝에 안젤라는 한때 이 땅의 서투른 문학소녀들의 일기장에 자로 인용되던 그 유명한 구절을 남긴다. "굿바이 조지, 우리는 항상 절정의 순간들을 굿바이 하면서 보냈지 않았어요?".

이 작품은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잉태된 태양을 향한 꿈의 여정의 이면에 길게 드리워진 어두운 악마의 그림자를 드러낸다. 이 작품 속에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미국인의 장미 빛 꿈에 대한 심각한 경고가 담겨있다. 윤리와 도덕을 밀쳐두고 부잣집 딸과 결혼하여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조지의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거부가 되어 잃었던 옛 애인과 사랑을 되찾겠다던 "위대한 갯츠비" (Great Gatsby)의 녹색 정원의 꿈처럼 헛된 물거품이 된다. 헛된 꿈의 종착역은 세속적 영락 아니면 도덕적 파탄이다.『아메리카의 비극』에서 코리아의 비극을 본다. 『젊은이의 양지』에서 이카로스의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돌진하는 한국인의 숨가쁜 여정이 보인다. 최종 종착역은 어디가 될지 실로 불안하기 짝이 없다.

안경환<서울대 법대 교수> ahnkw@plaz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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