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부실판정 제대로 할 수 있을까

  • 입력 2000년 10월 5일 18시 33분


정부는 금융부실을 정리하기 위해 공적 자금을 40조원이나 추가 조성하는 마당에 금융부실의 진원지인 기업부실 정리에 개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인 것 같다.

물론 부실기업이 자동적으로 시장에서 퇴출되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 보니 정부가 과감히 부실기업을 정리하겠다는 신호를 시장에 보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업계는 정부가 기준과 시한을 정해놓고 은행더러 한꺼번에 싹쓸이하듯 부실기업을 솎아내라는 방식에는 분명히 문제점이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신용공여 500억원 이상의 기업 중 은행권의 정밀실사 대상은 200개 안팎에 이르리라는 전망이다. 이 중에는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큰 60대 계열기업의 모기업과 4대재벌의 계열사도 포함돼 퇴출기업 선정에 어려움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의 기업 실적만을 놓고 미래의 성장 가능성을 판정하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업종별 특성도 고려해야 하고 한계기업 중에도 살려야 할 기업이 있을 것이다. 대기업 정리에는 금융부실과 고용 문제가 걸려 있다.

그렇지만 이자 갚을 돈도 벌지 못하고 장차 살아날 가망도 없는 기업이라면 빨리 솎아내는 편이 국민부담을 줄이고 나라경제를 살리는 일이다. 이런 기업들이 퇴출당하지 않고 계속 은행돈을 끌어쓰면서 은행과 국민의 부담만 늘려놓았다.

억지로 연명을 시켜준 워크아웃 기업들도 이번에 옥석을 가려내야 한다. 건설업종 같은 경우 이자 부담이 가벼운 워크아웃 기업들이 덤핑 수주를 하니 상대적으로 건전한 기업들까지 어려워진다.

은행들은 부실기업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원죄(原罪)를 안고 있다. 은행들이 신용위험평가위원회를 구성해 엄정하게 퇴출기업을 가려내겠다고 하지만 무엇보다 정부의 의지가 중요하다.

벌써부터 살생부에서 빠지기 위한 기업들의 저항과 로비에 관한 소문이 나돈다. 전체 퇴출기업 수가 워크아웃 기업 10개 안팎에 그치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나오는 실정이다. 소리만 요란하고 결과는 별 것이 없게 되면 국민의 실망이 엄청날 것이다. 4대 재벌 그룹 계열사라도 부실기업이라고 판정이 나면 공정하고 투명하게 솎아내야 해외의 신인도가 높아질 것이다.

구조조정의 고통을 피하려다 보면 다시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총선 때문에 기업구조조정을 실기(失機)해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과감히 썩은 살을 도려내 새살이 돋아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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