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전주성/투명한 정책이 실패 막는다

  • 입력 2000년 10월 5일 18시 25분


대우자동차에 이은 한보철강의 해외매각 실패로 가뜩이나 위기감에 찌들은 경제가 또 한 차례 들썩거린다. 뇌물경영의 표본이었던 한보와 확장경영의 대표주자였던 대우의 망령이 되살아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고 있었다면 포드나 네이버스 컨소시엄의 태도도 달라졌지 않았을까.

적금을 깨고 퇴직금을 쪼개서 산 주식이 반토막이 되고, 시장거리에 찬 바람이 분지 오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정부주도 낙관론에 덩달아 토를 달던 전문가들 숲에 가리긴 했지만 위기 가능성을 지적하고 신중한 정부의 처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부의 현실인식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집권세력이 남북문제에 정신을 빼앗겨 경제를 소홀히 한다는 수근거림이 적지 않았지만 경제를 놓치고는 남북대화도 정권재창출도 물 건너 간다는 판단을 지혜로운 대통령이 못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렸다는 것인가. 주변 사람들의 능력이 모자랐던 것일까, 아니면 용기가 부족해 제 할 말을 못했던 것일까. 이유가 무엇이건 일개 외국회사에 농락당하고도 항의조차 못한다고 대통령 자신이 개탄할 정도면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대통령이 국정의 초점을 경제에 맞추기로 한 것은 다행이지만 산적한 현안들을 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매달 개혁성과를 직접 확인하고,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경제관료들을 다그치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지만 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책임을 지려고 할지 장담하기 힘들다.

대우차와 한보철강의 매각실패에 대한 대통령의 질책이 나오기가 무섭게 한보철강은 추가손실이 없다는 식의 책임회피성 발언이 쏟아져 나온다. 한해 예산규모인 100조원을 상회하는 공적자금을 부실기관에 쏟아 붇는 과정에서 국민세금이 얼마나 제대로 쓰이는지에 대해 변변한 설명 한번 없었다. 심지어는 5000억원에 판 제일은행에 10조원이 넘는 세금이 들어가고 있는데도 당시로는 해외매각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변명까지 들린다.

왜 모두들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가. 한 두 건도 아니고 매사가 이 모양일 때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 문제가 아닐까. 한보철강과 대우차의 매각 계약시 위약금 등 계약파기에 따른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비난이 거세지만 그것이 계약에 참가한 우리측 대표들의 능력의 한계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통령의 찬바람 나는 호통에 모두들 바삐 움직이지만 뒤에서는 몸을 사리는 일에 급급하지나 않을지 걱정스럽다. 풀어줄 때는 한 없이 풀어주다 결과가 나쁘면 일벌백계식으로 나간다면 일하는 사람들이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대우차나 한보철강 매각과 유사한 실수를 하고도 일이 터지지 않아 살아남은 사람들이 운이 좋았다고 가슴을 쓸어내리지나 않을지 안타깝다.

정책에는 실수도 있는 법이다. 대통령 자신이 경제정책에 잘못이 있었다고 시인한다면 아랫사람들에게도 해명할 기회를 줘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안 되는 이유는 권한과 책임의 한계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과정이 떳떳하면 결과가 나빠도 시시비비를 가리기가 쉬울 텐데, 도대체 매사가 불투명하니 전문가들도 어디에서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언론보도를 보고 추측할 때가 많다.

지금은 시스템을 바꿔야 할 때다. 당장 갈 길이 멀고, 집권 후반기라 개혁의 약발도 잘 안 먹히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시스템을 바꾸는 데 반드시 거창한 국민적 정치적 합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현 시점에서 집권세력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개혁은 시간표 짜놓고 밀어 부치는 일이 아니라 정책결정의 과정과 내용을 투명하게 시장에 공개하는 것이다.

정보독점에 익숙한 관료들로서는 꺼림칙한 일이겠지만 여러 견해의 상호견제가 가능한 투명한 시스템만이 정책실수를 줄이고, 아울러 정책결정자의 책임부담도 덜어줄 수 있는 것이다. 유능한 공무원들이 복지부동의 굴레를 벗고 신명나게 일할 때 정책능력이 쌓이고 정부의 신뢰도 회복될 것이다. 지금 우리 관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더욱 감추게 만드는 북풍이 아니라 불투명성의 옷을 벗게 할 햇볕인 것이다.

전주성(이화여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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