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전진우/야당 총장의 ‘천박한 말’

  • 입력 2000년 9월 26일 18시 42분


무릇 말이란 말하는 이의 수준을 나타낸다. 더구나 정치인의 말은 그 자체가 정치다. 정치인은 말로 자신의 정치이념을 구현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인의 말이란 그의 가치관과 시대인식 역사의식 등이 농축돼 표현되는 것이다. 물론 농담이나 의례적인 말, 또는 실수로 내뱉거나 과장되게 쏟아내는 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농담이나 실언이라 해도 때와 장소, 의제에 따라 정치인의 말은 냉정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 “이북사람들은 왜 제주도를 좋아하지?”(박희태부총재) “제주도에서 반란났었잖아”(김기배사무총장). 엊그제 한나라당 총재단회의에서 나온 말이라는데 운을 뗀 부총재나 말을 받은 사무총장이나 ‘그 밥에 그 나물’이다. 김총장은 우리 정부가 남북 국방장관회담 장소를 결정하는데 있어 북측이 요구하는 대로 끌려다니고 있어 그 잘못을 지적하려 했다고 해명한다. 잘못을 지적할 수는 있다. 문제는 그 방식이고 말에 나타난 의식수준이다. 김총장은 ‘제주 4·3항쟁’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회담장소를 제주도로 하자고 한 ‘북측의 요구’에 연결짓고 있다. 한마디로 어이없는 발상이다.

▷‘제주 4·3항쟁’을 ‘반란’으로 보는 것은 그의 ‘이념적 성향’이라고 치자. 그러나 명색이 제1야당의 사무총장이 전체 도민의 10% 이상이 무차별 학살된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그렇듯 가볍게 혀끝에 올리고, 더구나 그것을 선뜻 남북문제에 끌어붙여 남북관계 전체를 희화화(戱畵化) 한대서야 제1야당의 간판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 한나라당 이회창총재는 줄곧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란 총론에는 찬성하나 그것을 이뤄나가는 과정에서의 각론에는 야당으로서 견제와 비판을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옳은 주장이다. 하나 어떤 견제며 비판이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당의 핵심인물이라 할 사무총장의 수준이 이 정도라면 한나라당에서 제대로 된 비판이 나올 수 있을지 걱정된다. 이총재는 역사에 대해 고민하고 시대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새인물을 곁에 둬야 한다.

<전진우 논설위원>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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