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디지털]"기술 이용에만 급급하면 본질 잃는다"

  • 입력 2000년 9월 18일 18시 25분


“위험이 더욱 더 가까워 올수록 구원자에로 이르는 길은 더욱 더 밝게 빛나기 시작하고 우리는 더욱 더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그 까닭은 물음이 사유의 경건함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기술에 대한 물음’이라는 논문을 몇몇 학생들과 원서로 강독하다가 위와 같은 마지막 문장에 접했을 때 마음에 와 닿은 일종의 희열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몇 달 전 독일의 대석학인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탄생 백주년을 축하하는 신문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가다머는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컴퓨터에는 물음이 없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답변했었다.

무섭게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오늘의 기술문명사회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던져야 할 물음은 ‘기술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물리학의 지식에 따르면 우주 안에 지구와 같은 생명권이 존재할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오직 하나뿐인 생명권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론상의 다른 생명권은 아직 우리에게 그림의 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직 하나뿐인 이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그것은 문화적 진화와 생물학적 진화의 속도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길게 잡을 것 없이 백년 전의 사람과 오늘의 사람은 달라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문화는 엄청나게 변하고 있다. 양뿐만이 아니라 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1972년에 로마클럽 보고서의 제목은 ‘성장의 한계’였다. 다시 말해서 기하급수적 성장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성장의 한계는 바로 인류의 위기를 뜻했다.

그런데 로마클럽의 보고서가 나오기 20년 전인 1953년 하이데거는 이미 ‘기술에 대한 물음’을 던지면서 기술의 본질을 논했다. “우리가 나무의 본질을 찾아 나설 때 개개의 나무를 나무로서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는 그것(즉, 나무의 본질)은 흔히 보는 나무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렇듯 기술도 기술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라고 첫머리에서 잘라 말한다. “우리가 기술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데만 급급하여 그것에 매몰되거나 회피하는 한 기술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물음은 그가 일찍이 ‘존재와 시간’(1926)에서 물은 존재의 물음과 맥을 같이 한다. 존재는 존재자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데서 출발한 존재의 물음은 존재자, 즉 있는 것이 그 있는 방식과 모습으로 있게 되는 것은 존재 때문이라는 데로 귀착된다. 이것은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본질을 기술이라는 낱말의 희랍어인 ‘테크네(techne)’에서 찾는다. 테크네라는 낱말은 은세공인이 은덩이를 깎아서 은쟁반을 만들어내는 수공뿐 아니라 화가가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는 예능에도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는 데 착안한 것이다. 즉, 테크네의 본질은 가려져 있는 것, 은폐되어 있는 것을 끌어내 앞에 내놓는 것, 다시 말해 은폐성으로부터 비은폐성으로 끌고 가는 데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테크네는 영어의 시(詩)라는 단어의 어원이자 예술적 활동을 뜻하기도 하는 ‘포이에시스(poiesis)’와도 상통한다. ‘포이에시스’도 그 자리에 없던 상태에서 그 자리에 있음으로 넘어가게 만드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가 진리라고 번역하고 있는 ‘알레테이아(aleteia)’라는 희랍어와도 뜻을 같이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은 탈은폐와 비은폐성인 ‘알레테이아’ 즉 진리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그곳에 본질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기술은 자연을 닦아세우는 도발적 요청으로 변하고 말았으며 나아가 주문요청으로 치닫고 있다고 하이데거는 오늘의 기술문명을 비판한다. 그래서 우리는 원자력시대를, 그리고 사람까지도 ‘맞춤인간’으로 상품화하고 있는 유전공학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와 같은 총체적인 위기에 더욱더 끊임없이 물어야만 한다. ‘기술은 무엇이냐?’라고. 그 까닭은 사람의 사람됨이 사유에 있다면 물음이란 바로 그 사유의 겸허함이기 때문이다.

김용준(고려대 명예교수·한국학술협의회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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