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보의 옛날신문 읽기]한국현실에 맞는 비장한 미팅을 하여라

  • 입력 2000년 9월 16일 16시 06분


어느새 가을입니다. 가을은 고독의 계절이라지요? 애인없는 젊은이들은 열심히 미팅을 해서 얼른 짝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가을맞이 기념으로 한국일보 71년 5월14일자 기사를 소개합니다.

여대생들의 미팅에 관한 장문의 기사인데, 이것저것 다 빼고 당시 대학생들의 멘트만 따봤습니다.

먼저 미팅 무용론을 주장하는 학생들의 말을 들어보시겠습니다.

“그저 그런 것 아니겠어요? 나쁜 것은 없는 무해무익한 거죠. 그러나 2번 했지만 싱겁기만 해요.”(이대 국문과 1년 S양)

“대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레크레이션'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별 의의도 없으며 끝난 후에는 시간만 낭비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만 듭니다.”(고대 국문과 4년 K양)

무용론으로는 성이 안차는지 목소리 높여 성토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미팅'이 본래의 순수성을 상실, 남자들의 희롱장이 되었어요. 따라서 제 경우 불참하는 입장입니다.”(서울대 음대 2년 P양)

◇미팅,말짱 헛거에요

미팅 무용론 더하기 경제적 부담을 이유를 들이대는 학생도 있군요. 당시 미팅은 주로 다방이나 회관(음식점인지 YWCA 회관같은 곳인지?)에서 이뤄졌다는데, ‘티키트'(티켓의 당시 표기법인 모양) 비용이 만만찮았나 봅니다.

“비용이 너무 무거워요. 또한 건전한 이성교제에 눈뜨려면 먼저 부담을 느끼지 않고 이성과 만나 서로의 세계를 엿보거나 타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미팅'이 끝난 후 서로 ‘친구나 애인'이 되는 경우는 99% 없습니다. 선배들의 표현처럼 <말짱 헛거>예요.(이대 법학과 2년 L양)

당시 대학생들이 이렇듯 한목소리로 미팅은 ‘말짱 헛것'이라고 생각했느냐, 그건 아닙니다. 미팅의 순기능에 대해서 일갈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소비풍조요 시간낭비의 모임이라고 흔히들 얘기하고 있지만 이성을 모르는 것보다는 이런 모임을 통해서 단편적으로나마 아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고대 농화학과 4년 L군)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군데의 교제장소에서 이성의 또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권장할 만한 것이 아닐까요.”(연세대 기악과 2년 L군)

미팅 자리에서 이성을 만나 뭔가 배우고 알게 되니 좋지 않느냐는 의견입니다. 그래서 권장사항이랍니다.

◇미팅으로 여성상 정립

자, 이제 클라이맥스입니다!

“산 경험을 때때로 얻고 있어요. ‘미팅'을 통해서 한국현실에 맞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정립해나가고 있습니다.”(서울대 상대 경제과 2년 C군)

즐겁고 명랑하고 경쾌한 ‘미팅'이라는 말이, 엄숙하고 비장하고 숙연한 느낌을 주는 ‘한국현실'이란 말과 만나 한 문장 속에서 같이 놀고 있습니다. 좀 어색하지요? 좀 혀가 꼬이지요?

◇이쁜척 여학생 싫어싫어

요즘 대학생들은 미팅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요.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MBC 웹진에서 지난해 대학생들을 상대로 미팅 특집을 했는데, 젊은이들의 멘트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어느 대학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요즘 대학생들은 ‘이런 사람이 폭탄'이랍니다.

“키도 작고, 매너도 없으면서 돈 계산은 똑∼부러지는 남자.”(박현진.수학과 95학번)

“못 생겼는데, 이쁜 척 하는 여학생들!”(송정훈. 사회과학 계열 99학번)

“꽉 끼는 청바지에 뾰족한 구두, 남자의 패션치고는 좀...”(오은주. 전기전자공학과 97학번)

“분위기에 맞지 않게 너무 튀거나 주도해 나가는 사람. 한편으론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면 부담되죠!”(장현순. 법대 93학번)

“얼굴은 별로 상관없는데 너무 썰렁하고 잘난 척 하는 자기 과시형 스타일∼”(윤혜경. 기계전자공학과 97학번)

◇요즘의 최악 미팅

이번엔 ‘내가 기억하는 최악의 미팅'이랍니다.

“예의가 너무 없었다. 술을 같이 마시는데, 술안주에 머리를 털 정도였으니까. 무척 기분도 나쁘고 불쾌했다...”(허연정. 수학과 95학번)

“물론 더치페이는 있을 수 있다.하지만, ‘너희가 차 값 내라, 우린 2차를 사겠다' 하는 식으로 너무나 딱딱하게 계산적으로 굴던 남학생들. 내가 기억하는 최악의 미팅이었다.”(박현진.수학과 95학번)

“대학에 들어온 지 얼마 안되어, 2대2 미팅을 했다.

불행하게도 두 여학생 모두 폭탄이었는데, 처음부터 노래방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만 부르고, 2차로는 오락실 가서 오락만 했다.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던 썰렁했던 그 미팅!”(엄정현. 경영학과 99학번)

“미팅 도중에 우리가 썰렁하다고 여자 파트너들이 그냥 일어서서 나가버린 일이 있다. 결정적으로 차 값도 계산하지 않은 채.”(박정원. 사회과학 계열 99학번)

“대화가 잘 안 통하니까 술 먹고 먹이는 그런 스타일의 미팅!”(김기홍. 의대 99학번)

네, 미팅을 통해서 한국현실에 맞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정립해 나가려고 노력하는 학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늘보<문화평론가>letitb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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