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담론]오늘도 작은 욕망과 싸운다

  • 입력 2000년 9월 4일 19시 14분


속도경쟁 나 자신과의 싸움
속도경쟁 나 자신과의 싸움
북악 스카이웨이 40, 올림픽대로 80, 경춘가도 80, 경부고속도로 100, 중부고속도로 110, 때로는 얼토당토않게 갑자기 10. 길가에 서 있는 표지판의 붉은 동그라미 안에서 운전자들의 신경을 몹시 거스르는 이 숫자들은 그 길의 제한속도를 표시한다. 속도제한 표지판이 없다고 해도 좋아할 일은 아니다. 표지판이 없는 일반도로는 시속 60㎞로 제한돼 있다.

속도 위반 자체가 불가능한 혼잡 지역을 벗어나자마자 운전자들은 고독한 싸움을 시작한다. 곳곳에 붙어 있는 속도 제한 표지판, 굽이굽이마다 속도측정기를 들고 숨어 있는 경찰, 멀끔히 공중에 매달려 내려다보는 무인속도측정카메라. 이 모두가 자신과 이웃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지만 그 친절한 배려를 피해 운전자는 필사적으로 달린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운전자가 싸우는 상대는 표지판이나 경찰이나 카메라가 아니다. 상대는 바로 속도위반 벌금이나 때로는 생명의 위험까지도 무릅쓰고 달려가는 자신의 욕망이다.

◇속도경쟁 나 자신과의 싸움◇

달리고자 하는 욕망과 다른 차보다 앞서 가려는 욕망과 무사히 살아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이 팽팽한 긴장을 이루다 보면 차와 자신과 도로, 그리고 삶의 욕망과 속도의 욕망까지 합일을 이루는 무아지경의 몰입이 찾아온다. 이것은 바로 카레이서가 아닌 평범한 운전자들까지 그 고독한 싸움으로 이끄는 매력이다.

맹자는 “작은 것을 키우면 소인(小人)이 되고 큰 것을 키우면 대인(大人)이 된다”며 간결한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역사에는 작은 욕망에 목숨 바친 사람이 부지기수다. 욕망이란 것을 하찮은 동물적 욕구 이상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맹자와 달리 순자처럼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 점잖지 못한 주장을 드러내놓고 받아들이기에는 인간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생산물이 너무 적었다.

◇욕망은 악이자 힘의 근원◇

그러나 욕망은 모든 악의 원인인 동시에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는 힘의 근원이기도 하다.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적극 이용한 자본주의가 발달하자, 생명(生)보다도 의리(義)를 따르겠다던 맹자의 고상한 의지조차 욕망의 일종으로 파악된다. 욕망을 인간의 본질로 보았던 스피노자를 계승해 인간의 의식보다 훨씬 방대한 무의식의 세계에서 욕망의 바다를 찾아낸 자크 라캉,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이 아닌 욕망을 소비하며 사는 인간군상의 의식과 심리를 파헤친 장 보드리야르 등은 바로 인간 욕망의 힘을 간파한 사람들이었다.

욕망이란 인류의 평화를 실현하거나 우주의 진리를 깨달으려는 거대한 야망에서부터 지하철에서 좀더 편안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아주 작은 욕심까지 대단히 다양하다. 식욕과 성욕을 비롯해 부와 명예, 육체의 안일, 또는 지식이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까지. 아직도 한정된 시공간에서 모든 욕망을 다 만족시킬 수 없는 인간은 매 순간 끊임없는 선택을 강요당한다. 그 욕망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불교에서는 인간 자신을 오온(五蘊)이라는 요소로 분해하고 세상의 존재를 감각기관과 감각대상과 인식으로 분해하며, 자기 자신에 대한 욕망(我執)과 타자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려 애쓴다. 하지만 그 고행의 길 또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욕망’의 지난한 싸움터다.

무인속도측정기 옆에 전파 송신기를 다는 상인들의 욕망과 그 전파를 받기 위해 전파 탐지기를 사는 운전자의 욕망, 그리고 이를 잡아내려는 경찰의 욕망이 불꽃 튀는 거리에 나서며 오늘도 ‘작은 욕망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철학박사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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