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디지털]"내나라 젊은이 두고 이민갈 수 없다"

입력 2000-09-04 18:57수정 2009-09-22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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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
《디지털과 인터넷, 그리고 벤처와 증시의 바람에 나부끼는 시대. 변화의 시대를 숨가쁘게 따라가느라 인류가 이제껏 추구해 왔고 추구해야 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잊은 것은 아닌가. 새 기획 ‘아날로그 @ 디지털’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지켜온 지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

스물 다섯의 나이에 200여 년이나 군림하고 있었던 뉴턴의 패러다임, 즉 결정론적 인과율을 뒤흔든 불확정성원리를 발견한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그는 서른 살에 이미 독일 라이프치히대 교수가 되어 있었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정권은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었고 그 정권의 전위대라고 할 수 있는 히틀러 유겐트에 소속되어 있는 한 학생이 하이젠베르크의 강의를 수강하고 있었다. 이 학생이 어느 날 하이젠베르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1차대전에 패배한 독일 정부는 정경유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경제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독일은 노력과 희생적 봉사가 조롱거리 밖에는 되지 않는 험악한 사회로 변하고 말았다. 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그리고 작금의 가장 심한 부도덕한 스캔들에는 유대인들이 반드시 끼어 있다. 이러한 혼란을 바로 잡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기 위하여 나치정권은 기치를 높이 들었고 우리 히틀러 유겐트도 그 전위대로서 매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선생님과 같은 우수한 젊은 교수가 우리들과 손을 맞잡지 않고 보수적인 늙은 교수들과 굳은 유대를 가지고 있는 서클에 소속되어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느냐.”

하이젠베르크의 답변 요지는 다음과 같다. “젊은 학생들만의 문제라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관철하기 위하여 얼마든지 학생들과 무릎을 맞대고 토론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거대한 민중이 이 운동에 빠져들고 있기 때문에 몇몇 학생들과 교수들의 의견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미 혁명의 지도자들은 이성을 되찾으라는 지성인들의 충고를 도리어 경멸하고 있지 않은가.”

하이젠베르크는 이어 “과학에서는 사람들이 가능한 한 적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때, 즉 우선 좁고 윤곽이 확실한 문제의 해결에만 노력을 한정시킬 때에만 혁명의 결실이 있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9년 여름에 하이젠베르크는 시카고대에서 특강을 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한다. 거기서 하이젠베르크는 학생시절 같이 공부했던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페르미(Enrico Fermi)를 만난다. 페르미는 하이젠베르크에게 미국에 이민오라고 강력하게 권한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미국은 하이젠베르크에게 모든 편의를 제공할 것이니 어떤 희망도 없는 독일에 되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거의 항변조로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의 대답은 냉철했다. 이민와야 했다면 그 결정은 옛날에 이루어졌어야 했으며 지금은 자기의 주위에 모여있는 젊은이들을 위해서라도 귀국해야 한다고 우겼다.

페르미는 심지어 만에 하나라도 독일이 승리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고 힐난조로 대든다. 하이젠베르크는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으며 또한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단언하면서 “나는 사람들이 그 결단에서는 시종일관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어떤 일정한 주위환경과 일정한 언어와 사고영역에 태어나서 매우 어릴 때 그곳을 떠나지 않는 이상 그는 그 영역에서 가장 적절하게 생장할 수 있으며 또 그곳에서 가장 능률적으로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귀국길에 오른다.

2차대전이 끝난 후 하이젠베르크는 서독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서독의 핵무장은 백해무익하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들은 이와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고 정치의 수장인 아데나워 총리는 원자무기에 강한 집착력을 보이고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아데나워의 태도에 대하여 괴팅겐 18인회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아데나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하이젠베르크는 아데나워 수상으로부터 입각교섭을 받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1901년에 태어나 1976년에 이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하이젠베르크는 이렇게 살았다.

김용준(고려대명예교수·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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