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규민]사람은 가도 '부실' 은 남는 것

  • 입력 2000년 9월 1일 18시 59분


김대중대통령은 일찍이 야당 총재시절이던 97년 3월 한보사태가 터지자 긴급 경제기자회견을 갖고 관치금융의 속성과 실상을 이렇게 개탄했다. "한보와 관련해 용서할 수 없는 뇌물수수죄를 저지른 사람외에는 특단의 조치(용서)가 필요하다. 이번 사태를 비롯해 그동안의 금융비리는 관치금융이 빚어낸 비극인 만큼 권력에 의해 지배된 약자입장의 은행은 억울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권력의 지시대로 부실대출을 해야만 하는 것이 우리금융의 현실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그는 변함없이 관치금융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대책을 지시했던 기록이 여러군데 남아있다. 당선자의 영향을 받은 대통령직 인수위원들은 당시 재경원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관치금융으로 나라를 이꼴로 만든 주역으로서 반성부터 하고 업무보고를 하라" 며 관리들을 나무랄 정도였다.

눈여겨 볼 대목은 그 때 재경원 고위관리의 대답이다. "관치에는 세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관이 규정에 따라 금융기관을 관리하는 것과 둘째 관리들이 규정을 넘어 권한을 남용하는 경우, 그리고 세 번째는 업무적으로 관련없는 정치권력이 은행인사에 개입하거나 기업대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부작용이 가장 큰 마지막 경우를 위원님들이 곧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

변하기 어려운 권력의 속성을 지켜본 직업관료의 뼈있는 예언이었다. 그리고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그렇게 관치금융을 싫어하는 대통령밑에서 요즘 다시 살아난 관치망령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청와대 행정관의 형이 수백억원의 거액을 은행에서 부당대출 받은 사실이 들통났는데 이들 형제는 실세장관과 (먼)친척이 되는 사람이라고 한다. 청와대 행정관은 지급보증 때문에 보증기관에 갔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데 명함속에 권세가 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거기에 간 자체가 관치에 해당할 수 있다.

이들 형제의 대출보증 요청을 거부한 신용보증기금 지점장이 청와대내 사직동팀의 조사를 받다가 사표를 낸 사건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사직동팀은 단순한 비리수사였다고 말하지만 당사자는 양심선언을 통해 현직 장관의 개입을 주장한다. 수사기관이 흔히 사용하는 전화통화기록 조회를 통해 간단히 확인할 수 있는 일일텐데 왜 그렇게 시간이 걸리는지 모르겠다. 만일 이 사건이 관치금융 거부 금융인에 대한 박해의 일단이라면 보통일이 아니다. 우리 금융인들이 권력앞의 파리목숨 정도로 비춰질 때 국내 금융기관들의 해외 신인도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지면 그렇게도 관치의 유혹을 떨쳐 내기가 어려운 것인가. 관치금융을 그토록 혐오한다는 김대통령이 집권했는데도 최소한 8월개각 이전에는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는 시중은행 간부들의 증언은 그 중독성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 지를 잘 말해준다. 아직 조사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어쨋던 이번 일에는 바로 대통령 턱밑의 청와대 행정관출신이 연루되어 있다. 자칫 국민에게는 대통령시야에서 떨어져 있는 다른 권력기관들의 관치수준을 확대해석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한없이 되풀이된 얘기지만 지난 97년말의 외환위기는 한보 기아같은 대기업에 빌려준 엄청난 돈을 떼이면서 금융기관들이 부실해졌고 이에따라 외국에서 달러를 빌어올 수 없게 된 것이 직접적 원인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이들 기업에 돈을 빌려주도록 압력을 가한 정치권이 있었다. 그로인해 나라경제가 무너져 발생한 고통과 피해는 국민이 골고루 나눠 가져야만 했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국민은 정부에 대해 관치금융의 중지를 요구하고 철저한 수사를 촉구할 권리를 갖는다.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지만 7월 금융파업때 정부와 마주앉았던 노조가 관치금융 철폐를 그토록 고집했고 끝내 정부가 무릎을 꿇고 관치포기를 약속하던 모습은 그런 의미에서 상징성이 있다.

실세장관의 (먼)친척 형제들이 청와대 명함을 들고 금융권을 설치고 다닐 바로 그 무렵 서울의 다른 한 켠인 국회에서는 경제청문회가 열려 집권여당이 과거 정권의 금융관치를 목청높여 비난하고 있었다. 야당총재시절 김대통령이 언급했던 '우리 금융의 현실' 은 집권후에도 그대로 였는데 말이다. 반복되는 역사를 지켜보면서 어느 정권에 가서야 이 관치논쟁이 끝을 낼 것인지 그저 우울해질 뿐이다.

<이규민 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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