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에 감춘 비밀]이몽룡은 실존인물이다

  • 입력 2000년 8월 1일 20시 26분


우리 고전 가운데 이른바 '국민소설'로 《춘향전》을 꼽는데 이견이 있을까. 《춘향전》에 대한 애착은 이미 16번이나 만들어진 영화 목록에서도 드러난다. 아름답고, 지적이고, 지고지순하면서도 열정적인 춘향이와 잘 생기고 집안 좋고, 은근한 위트의 이몽룡의 사랑. 거기에 방해꾼 변학도와 감칠맛 나는 조연 향단, 방자, 월매, 그리고 순탄치 않았던 사랑의 극적 해피 엔딩.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백성의 피를 빠는 탐관오리가 정의의 어사 출두 앞에 벌벌 떠는 모습은 공공연한 사회악에 울분을 느꼈던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마저 준다.

《춘향전》은 작가가 알려져 있지 않고 사람들 입으로 전해내려오다 책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듯 춘향전의 수많은 이본들은 지역마다 세부적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그런데 지난 4월 설성경 교수(연세대 국문과)가 춘향전의 저자는 의병장이었던 조경남 장군(1570∼1641)이며 1640년경에 씌어졌다고 발표해 화제가 됐다.

조경남은 의병장 조헌의 제자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고, 1582년 이후 57년 동안 국내 역사를 일기형식에 담은 《난중잡록》과 《속잡록》이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설성경 교수는 "남원에서 평생을 보낸 조경남(1570∼1641)은 상당한 수준의 문필가로 춘향전의 구성이나 주제에 필요한 지식이 충분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조경남을 춘향전의 저자로 보는 더 큰 이유는 이몽룡의 실제 모델로 지목되는 계안 성이성이 바로 그의 제자라는 사실 때문이다.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은 남원부사를 지냈던 부용당 성안의(成安義 1561∼1629)의 아들인데, 그를 이몽룡의 모델로 보는 데는 여러가지 근거가 있다.

◆남원에서 지내던 성이성이 모델?

먼저 춘향과 사랑을 나누던 이몽룡의 나이에 성이성이 남원에서 지냈다는 사실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성안의가 남원 부사로 부임한 것은 선조 40년(1607년), 이때부터 광해군 3년까지 5년 동안 남원에 머물렀다. 이때 성이성의 나이는 13세부터 17세 사이. 16세에 춘향을 만나 사랑하고 그 이듬해인 17세에 헤어진 이몽룡과 같다. 또, 성이성의 성품이 곧아 여러 차례 어사로 임명돼 암행했었다는 사실도 또하나의 근거가 된다. 물론 조선의 관행상 20대에 암행어사가 되지는 못했으며, 남원에서 어사출두를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성이성의 후손 성섭이 남긴 문집 〈교와문고〉(전3권)에 묘사된 성이성의 어사 출두 장면은 춘향전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

"… 호남 암행어사가 됐을 때 호남 12고을 수령들이 잔치를 베풀었다. 암행어사가 걸인의 행색을 하고서 … 그대가 시를 지으면 종일토록 놀고 짓지 못하면 가라. … 암행어사가 운자를 불러달라고 했다. 기름 膏자, 높을 高자를 주더라…"

이때 성이성이 지었다는 시는 이몽룡의 시와 거의 같다.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일만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좋은 안주는 일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농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망 소리 높더라.(金樽美酒/千人血//玉盤佳肴/萬姓膏// 燭淚落時/民淚落//歌聲高處/怨聲高)".

이 '금준미주'는 춘향이의 개인적 한과 백성들의 곪은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어사 출두 대목에서도 단연 압권이다.

◆ 눈보라 속에 찾아간 광한루

춘향전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탐관오리의 잔치상 말석에 앉아 먹을 것을 구걸하던 거지가 이 시를 툭 던질 때의 통쾌함을 알 것이다. 이 시는 원래 광해군 때 명나라 사신 조도사가 읊은 것인데, 앞서 소개한 조경남 장군이 《속잡록》에서 처음 소개했다. 성이성이 그의 제자였던 만큼 이 시가 어떻게 나온 것인지 분명해진다. 어사출두는 아니지만 성이성의 행적이 담긴 비문에는 암행어사였을 때 남원에서 귀신이 많이 나오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무엇보다 성이성이 직접 쓴 문집의 '호남암행록'의 한 구절은 여러가지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암행일지에서 호남지방을 돌던 성이성은 인조 25년 11월 22일, 순천에서 부득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암행을 끝낸다. 그리고 12월 1일 남원으로 갔다. 이 날은 눈보라가 크게 일어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날씨가 나빴다고 한다. 그런데, 성이성은 굳이 눈보라 속에 광한루를 찾았다.

그리고 무슨 연유에선지 노기, 즉 늙은 기생 여진이 찾아와 함께 얘기를 나눴다. 그 다음 성이성은 "해가 저물므로 모든 기생들을 물러나게 하고 작은 동자와 서리와 함께 난간에 앉았으니 눈빛이 뜰에 하얗게 깔려 있고 대나무숲이 희었다.… 그리고, 소년시절의 일이 생각나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고 적었다.

◆ '춘향'에 얽혀 전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

그가 말한 '소년사(少年事)'란 무엇일까. 이몽룡이 실존인물이라면 춘향이는 누군가. 사실 춘향이란 이름은 남원 곳곳에 전한다. 하지만 춘향전과는 달리 그 결말이 한결같이 불행하다.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박색설화'. 차정언(車鼎言)이 쓴 《해동염사 海東艶史》에 전하는 이야기는 관기 월매의 딸 춘향이 타고난 박색이어서 서른이 넘도록 결혼을 못하다가 이도령을 보고 반해 병을 앓게 됐다는 것이다.

월매는 방자를 꼬드겨 이도령을 광한루로 유인하고 향단을 말쑥하게 꾸며 이도령에게 술을 권해 취하게 한 후 집으로 데려와 춘향과 잠자리를 함께 하게 했다는 것이다. 다음날 떠나는 이도령에게 비단수건을 정표로 받았으나 이도령은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고 춘향은 이도령을 기다리다 광한루에서 목을 맸다는 것이다.

다른 박색설화도 내용은 거의 흡사하다. 남원 사람들이 불쌍하게 죽은 춘향을 위해 이도령이 떠난 고개에 장사를 지내 오늘날 그 고개를 '박석고개'라 부른다는 전설도 있고, 춘향의 원한으로 남원에 3년 연속 흉년이 들자 이방이 '춘향전'을 지어 위로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만일 춘향전이 실화라면, 그 진짜 결말은 이 전설에 가까울 것이다.

조선시대의 작은 고을에 부사 자제와 어린 기생의 로맨스가 있었다면 사람들이 몰랐을 리 없다. 성이성의 후손들이 이몽룡의 모델이 성이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천기와 어울렸다는 소설 내용 때문에 최근에야 공식적으로 인정했을 정도니 과거에는 어땠을까.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춘향이 죽음을 택했다면, 사람들은 그 불행에 자신의 신세를 투사해 아름답고 행복한 사랑이야기를 만들어 춘향과 함께 바로 자기 자신을 위로하려 했을지 모른다. 많은 사람이 그토록 춘향전을 사랑한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이현주(북코스모스 http://www.bookcosmos.com) hyunjoo70@bookcosm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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