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육정수/헌법과 '베트남民 사살'

  • 입력 2000년 7월 16일 19시 58분


오늘은 대한민국 헌법이 만들어진 날이다.

52년전인 1948년 7월17일 탄생한 헌법은 그동안 9차례나 개정됐다. 그러면서도 국가권력 구조의 기본 틀과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각종 인권조항을 담고 있는 점에서는 큰 변함이 없다.

이 두가지 가운데 ‘국가의 권력구조’보다는 ‘국민의 인권’이 상위(上位)의 가치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전자가 수단이라면 후자는 목적인 셈이다. 헌법 안에서 인권조항을 권력구조 부분보다 앞에 배열한 것은 그런 뜻에서일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권이 특정국가 국민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헌법에 담긴 인권보장의 정신은 우리 영토밖의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존중돼야 할 보편적 가치인 것이다.

그런 전제하에서 제헌절날 아침에 한 사건을 생각해보고 싶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대법원이 어느 파월(派越) 국군 소대장에게 베트남 민간인 사살혐의를 인정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는 ‘31년전의 뉴스’. 본보 기자가 이 ‘세계적 특종’을 취재해 왔을 때 솔직히 믿고싶지 않았다. 정서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베트남인 6명을 민간인인줄 알면서 살해했다’ ‘그것은 전과를 올리려는 욕심때문이었다’ ‘시계 베트남 돈 등을 빼앗기도 했다.’

대법원이 ‘사실’로 판단한 이런 혐의 내용들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사실로 인정됐다. 이 사건은 어찌된 일인지 당시 박정희정권하에서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발굴됐다.

그러나…. 당시 파월 국군 전체 차원이 아닌, 한 소대장의 ‘개인적 일탈’문제로 축소해석하면서도 곤혹스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언론의 책임과 국익(國益)측면을 저울질해보지 않을 수 없는 미묘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편집간부들과 장시간, 그리고 수차례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그 결과 보도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살해된 베트남 민간인들의 인권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보편적 가치를 우선시한 것이다. 6·25전쟁 당시 미군의 노근리 학살사건과 일제(日帝)의 한국인 학살사건 등에 대한 진상규명 및 배상책임만을 일방적으로 묻는 ‘좁은 언론’이어서는 안된다는 관점이었다.

다만 ‘양민 학살’ 대신 ‘민간인 사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로 했다. ‘선량한 민간인을 잔혹하게 죽였다’는 뜻의 양민학살로 보기에는 여러 의문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가치중립적 표현인 ‘민간인 사살’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판결문도 이 표현을 사용했다.

당시 소대장은 10개월도 안되는 사이에 기소→1심 사형선고→2심 무기징역 선고→3심 무기징역 확정의 과정을 일사천리로 거친 뒤 징역 20년으로 감형됐다가 15년을 살고 가석방됐다. 목사가 된 그는 ‘희생양’이었음을 비추며 억울하다고 호소(본보 14, 15일자 보도)하고 있다.

‘전선(戰線)없는 전쟁’ 상황에서 야간 매복중 오전 1시경 베트남인 무리를 발견했다면 그의 주장대로 ‘베트콩’으로 오인했을 수도 있다. 이성적 판단을 기대하기는 무리한 상황이었는지 모른다.

이 사건은 두 방향의 인권문제를 제기한다. 피해자인 베트남 민간인들과 가해자인 소대장 모두 전쟁이 낳은 ‘인권 피해자’일 수 있다. ‘진실 발견’노력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육정수 사회부장>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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