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담론]누군가 보고 있다

  • 입력 2000년 7월 3일 19시 10분


누군가가 보고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전세계적 위성통신감청망인 ‘에셜론(Echelon)’이 산업 정보를 감청한 사실이 드러나고, 영국도 국내에서 송수신되는 모든 e메일과 인터넷 메시지를 감시하는 기관을 설립할 계획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은 이미 강력한 인터넷 검열 정책을 펴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상당수 기업들이 정보 유출 방지를 이유로 사원들의 통신을 검열한다.

이에 대해 개인들은 무기명 메일 사이트를 찾고 e메일 암호화 프로그램을 사용하며 자신을 보호할 방도를 찾는가 하면, 때로는 가상공간을 이용해 통제 권력의 심장부를 공격하기도 한다. 나아가 프로그래머들이 연대해 외부검열이 불가능하고 익명성과 정보소통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며 저작권법이 적용되지 못하는 무정부주의적 자유인터넷 ‘프리넷’을 추진한다는 소식도 있다.

통제와 자율의 숨바꼭질은 인간이 공동체를 형성한 이래 끊임없이 계속돼 왔다. 통제의 근거는 언제나 공동체의 안정과 안전보장, 또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개인의 보호를 명분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선의 결과를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입장이든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는 의무론적 입장이든 개인에 대한 통제와 간섭은 그가 합리적 절차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될 경우에 정당화되고, 이런 판단을 하는 통제 주체의 지적 도덕적 우월성을 전제로 한다. 통제 주체는 “나는 합리적 판단을 할 능력을 가졌지만 너는 그럴 능력이 없다” “네가 알 필요가 있는 것은 내가 가르쳐 준다”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때로는 합리적이고 대등한 개인이 서로 상품과 정보를 교환할 수 있을 만큼 사회적 신뢰가 구축되지 못했을 때도 국가의 통제가 개입한다. 영국 옥스퍼드대 디에고 갬베타교수(사회학)가 주장하듯이 저신뢰사회에서 사업자간의 신뢰가 없으면 심각한 경제적 결과가 초래된다. 이 경우 국가가 개인이나 기업의 신뢰를 대신 보장하고 대신 이들의 활동에 개입하는 것이 정당화되곤 한다. 특히 유교적 가족주의와 지식인 관료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돼 왔던 우리 사회에서는 지식인 관료의 사적 신뢰망이 사회적 신뢰체계를 상당부분 대신해 왔다.

그러나 인쇄술의 발달을 통한 지식대중화의 단계를 거쳐 정보통신혁명을 통한 지식공유화의 단계에 이른 지금 통제 주체인 지식인 관료의 지적 도덕적 우월성을 계속 주장하기는 어렵다. 지식과 정보는 이미 네트워크를 통해 공유되고, 엄격한 도덕교육 과정도 거치지 않은 채 그저 기존 사회의 기득권에 젖어버린 이들의 가치관은 전지구적 문화의 소통을 감당하기 어렵다. 더욱이 사회와 개인의 안전을 위한다던 검열과 통제가 정부의 잘못을 은폐하든가 권력을 옹호하려 했던 일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통제 주체의 신뢰도는 하염없이 하락해 있다.

책임있는 개체로 성장하는 데 유난히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 인간임을 감안한다면 현재 필요한 것은 합리적 판단을 내리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성년의 나이를 몇 살 이상으로 정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뿐이다. 책임있는 개체들은 지식 정보의 소통이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해 가는 세상, 그리고 거짓이 은폐되기 어려운 인터넷 통신의 세상에서 서로의 신뢰를 끊임없이 재평가하며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신뢰할 만한 정보가 제공된다고 인정되는 곳에는 연대가 형성되고 자본이 투여되며, 신뢰가 무너진 곳에서는 연대와 자본이 유출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 통제와 간섭 대신 신뢰도를 지켜보는 지식정보사회의 ‘보이지 않는 눈’이 개인과 사회의 안전을 보호한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나도 당신을 보고 있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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