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존/톰 크루즈 특집]"그가 가장 빛났던 순간"

  • 입력 2000년 6월 12일 11시 21분


톰 크루즈는 1981년 이래 22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 만큼 다양한 성격의 배역을 능숙하게 소화한 배우도 많지 않다. 때로는 만화 주인공이기도 하며 반전을 외치는 전도사이기도 하고 한 여자와의 관계에서 확신을 얻지 못하는 가엾은 여피이기도 하다.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톰 크루즈의 연기가 가장 빛난 영화를 돌아본다.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얼굴, <칵테일> ▼

<칵테일>에서 돈 버는 걸 필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바텐더 주인공 브라이언 플레니건(톰 크루즈)은 낮에는 대학에 다니고 밤에는 술집에서 일한다. 어느 교수가 성공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인생을 설계하라는 뜻에서 각자의 사망 기사를 제출하라고 하자 톰 크루즈는 이렇게 자기의 미래를 읊조린다. "상원 의원에 억만장자인 브라이언 플레니건은 99세에 7번째 아내인 18세의 아내와 정사를 벌이다 사망했다."

늦된 청년의 성장통(痛)과 러브 스토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가벼운 영화 <칵테일>에서 톰 크루즈의 연기는 이 우스꽝스런 대사와 함께 빛난다. 대단한 연기파에 속한다고 할 수 없는 톰 크루즈지만 이 영화에서 그는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어렵게 성장한 실제 삶의 그늘진 흔적과 그의 야망을 보여준다. 무모한 열정과 터무니 없는 자신감으로 세상을 만만하게 보던 청년이 좌절을 거친 뒤 자기 깜냥 대로 적응해 가는 브라이언 플레니건의 모습은 그래서 사실적이다.

세상 모든 것에 냉소적인 선배 바텐더에게 사정 없이 휘둘리고 잠깐 동안이나마 야망의 대상이었던 여사장에게 자발적으로 버림을 받으며 사랑하는 여성에게 결국 돌아가는 톰 크루즈의 여정은 풍부한 표정 연기로 드러난다. 달라붙는 상의와 퍼머를 푼 촌스러워 보이는 머리 모양과 그 표정은 앙상블을 이룬다. 이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헐리우드의 실세가 됐지만 톰 크루즈의 얼굴에서 여전히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그늘을 읽게 되는 것은 1988년 영화 <칵테일> 때문이다.

<김태수 기자>

▼모범생이 전락해 가는 모습,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톰 크루즈는 지루할 정도로 정도(正道)만을 걷는다. 그것이 톰 크루즈가 흔들림 없는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동력이겠지만 가끔은 그도 타락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이런 기대를 충족시키는 드문 영화다. 끝없이 피를 찾아 헤매야 하는 어둠의 세계. 그곳으로 섬세한 귀족 청년 루이스(브래드 피트)를 끌어 들이는 뱀파이어 레스타트는 살인의 쾌락을 즐기는 인물이다. 그는 차마 사람의 피를 빨지 못하는 루이스에게 어린 소녀를 제물로 던지면서 도덕과 금기를 파괴하라고 강요한다.

창백한 빛을 발하며 어둠을 휘어 잡는 뱀파이어 레스타트. 온몸에서 냉기를 내뿜는 최초의 뱀파이어 아만드(안토니오 반데라스)를 따라 잡지는 못하지만, 톰 크루즈가 연기하는 레스타트는 사악하도록 아름다운 입술로 죽음을 부른다. 거리낌없이 파멸에 몰두하는 그의 영혼은 신에게 맞서는 지하 세계의 공동체에 부족함이 없다.

무엇보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톰 크루즈는 그가 사랑하는 대상 때문에 특별하다. 그가 집착하는 상대는 마술 같은 금발을 반짝거리는 청회색 눈동자의 소녀 클라우디아가 아니다. 루이스는 소녀의 육체와 여인의 영혼을 지닌 클라우디아를 사랑하지만 레스타트는 그런 루이스를 포기하지 못한다.

유혹하고 위협하고 매달리면서, 그는 루이스를 자신 안의 암흑 속에 가두고자 한다. 여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브래드 피트의 목덜미에 깊숙이 송곳니를 박는 톰 크루즈. 선량한 여피 청년 톰 크루즈에게 이보다 더 한 타락이 있을 수 있을까? 검은 머리의 안토니오 반데라스처럼 어둠에 친숙하게 섞이지도 못하고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브래드 피트처럼 애잔하지도 않지만,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의 톰 크루즈를 지켜 보는 일은 충분히 즐겁다. 모범생이 전락해 가는 모습은 언제나 변함 없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김현정 기자>

▼캐릭터의 표상, <위험한 청춘> Risky Business (1983) ▼

<위험한 청춘>은 예비 여피의 위험천만한 사업을 다루고 있다. 그 사업의 아이템이란 매매춘이며 사업의 목표는 섹스와 돈, 그리고 명문대 진학이다. 부모처럼 여피로 살려면 말 잘 듣는 범생이가 돼야 하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지 않으려면 화끈하게 까져야 한다.

이것이 예비 여피의 존재론적 딜레마다. 조엘(톰 크루즈)은 성적도 나쁘고 몽정과 자위에 허탈해 하는 고등학생이다. 부모가 여행을 떠난 사이 조엘은 "까지껏"하며 사고를 친다. 그의 위험천만한 사업은 운 좋게도 섹스와 돈, 명문대 진학을 안겨주지만 도덕심은 그를 떠났다. 그럼으로써 그는 성공적으로 여피가 된 것이다.

1980년대의 브랫 팩 톰 크루즈가 주연한 <위험한 청춘>은 'R등급 십대영화'의 원조이다. 이 영화에서 톰 크루즈는 수줍은 소년에서 야심찬 청춘스타의 모습으로 이동한다. 통통한 볼 살이 귀여운 톰 크루즈는 검은 자켓에 검은 선글래스를 쓰면서 우리가 아는 톰 크루즈가 된다. 톰 크루즈에게 검은 선글래스는 성공의 동반자다. <위험한 청춘>에서 그는 캐릭터의 정확한 이미지를 보여줬고 <위험한 청춘>이 '스타 비히클' 이상의 작품이 되겠끔 충분히 연기했다.

<한승희 기자>

▼한계가 없는 것 같은 에너지, <매그놀리아>…▼

스타에게는 숙명처럼 따라붙는 이미지가 있다. 줄리아 로버츠는 무슨 역할을 해도 '귀여운 여인'이고 실베스터 스탤론은 뭘 해도 '람보'이며 아놀드 슈와제네거는 터미네이터, 이런 식이다.

성공한 헐리웃의 스타들은 그런 고정된 스타의 페르소나에 저항하지만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브루스 윌리스는 존 맥클레인 형사의 이미지에서 벗어났지만 그래도 맥클레인 형사로 나올 때가 가장 멋있었다. 실베스터 스탤론은 캅 랜드에서 뚱뚱하게 체중을 불리면서까지 열심히 했지만 자기 이미지를 벗는데 실패했다.

그럼, 톰 크루즈는?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에서 그는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면서 하룻밤 방황하는 여피 의사로 나온다. 어떤 여자도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는 한 여자와의 관계에서 확신을 얻지 못하고 헤매는 가련한 영혼을 연기하기 위해 큐브릭의 연출에 의탁해 3년을 매달렸다.

<매그놀리아>에서는 섹스 전도사로 나와서는 인터뷰하러 온 기자 앞에서 속옷차림으로 덤벙대다가 자기 비밀을 들키고 서서히 낭패감을 노출하는 남자로 나온다. 크루즈는 자기 스타 이미지, 섹시하고 자신만만하며 흡인력 있는 양키 남자의 매력을 관객에게 던져놓은 다음, 조금씩 그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역할로 관객을 도발한다.

그것이 늘 가슴 저릿한 것은 아니지만 그 한계가 없는 것 같은 성실한 에너지는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것이다. 올리버 스톤의 <7월 4일생>에서 그는 하반신 마비가 된 상이용사로 나와 고무 호스로 오줌을 누는 비참한 인물로 나온다. 톰 크루즈는 연기 영역을 넓히는 도전과 액션 스타 이미지의 정착이라는 이중 곡예에 매달려 있다.

그의 스타 페르소나는 스크린 안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진흙탕에 나뒹구는 역할에 가장 자신있게 도전하는 스타 배우라는 인상을 주면서 그는 스크린 안과 밖에서 자기 페르소나를 쌓아가고 있다. 나는 그의 그런 에너지가 가장 멋있다.

<김영진 편집위원>

기사 제공: FILM2.0 www.film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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