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유창혁의 부진 "기풍 변화 탓?"

  • 입력 2000년 6월 7일 19시 27분


‘세계 바둑대회 우승 제조기’인 이창호9단도 우승을 하려면 몇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결승전에서 마샤오춘(馬曉春)9단을 만날 것. 다른 기사와 대결한다고 해서 우승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9단과의 결승전에서는 진 적이 없기 때문. 또 결승전에서 조훈현(曺薰鉉)9단을 만나지 말 것. 조9단은 지난해 중국에서 개최된 제1회 춘란(春蘭)배 결승전 같이 3번기 또는 5번기 승부에서 이9단을 이길 수 있는 흔치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중 꼭 필요한 조건이 있다. 준결승전에서 유창혁(劉昌赫)9단을 만나지 말 것.

유9단은 96년 제1회 삼성화재배, 98년 LG배 세계기왕전, 올해 LG배 세계기왕전 등 모두 3차례 준결승에서 이9단을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확률적으로 그처럼 이9단의 우승을 저지한 프로 기사는 없다.

그러나 유9단의 최근 성적은 그답지 않게 부진하다. 지난달 잉창치(應昌期)배 16강에서 일본의 노장 오다케 히데오(大竹英雄)9단에게 무릎을 꿇은 것을 시작으로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전에서 중국의 위빈(兪斌)9단에게 져 타이틀을 내줬다. 2일 열린 후지쓰(富士通)배 8강전에서도 중국의 창하오(常昊)9단에게 다 이긴 바둑을 반집 졌다. 국내기전인 왕위전에서 윤현석(尹炫晳)5단에게 불계승한 것이 지난달 올린 유일한 승점.

유9단의 올해 성적은 17승 13패로 승률 56.7%. 그가 가장 성적이 안좋았던 97년 57.3%(35승 26패)보다 떨어지는 수치다. 유9단의 성적 부진은 원래 기복이 심한 기풍 때문이라는 것이 바둑계의 일반적 분석이다.

‘공격적’ ‘낙관적’ ‘강력한’ 등이 유9단의 바둑을 특징짓는 몇가지 단어.

이런 유의 기사들은 기세와 리듬을 타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한창 뻗어나갈 때는 누구도 이기기 힘들지만 한번 기세가 꺾이거나 리듬이 끊기면 강자는 물론 약자에게도 쉽게 나가 떨어진다. 특히 LG배 세계기왕전에서 한수 아래로 평가되던 위빈9단에게 밀린 것이 상당한 충격이었다는 얘기다.

유9단은 평소 큰 승부에 강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전체적으로 이창호9단에게 밀리면서도 중요한 길목에서 번번이 이9단의 덜미를 잡는 것은 ‘나는 언제나 누구든지 이길 수 있다’는 낙관과 전의가 불타기 때문. 즉 상금이 많고 중요한 결승전보다는 누가 바둑판 앞에 앉아있느냐가 유9단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반면 상대방이 약하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심리적으로 누그러진다.

이번 LG배의 경우 유9단이 세계최강자를 꺾었다는 심리적인 포만감과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리듬감을 잃고 바둑을 그르쳤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사실 유9단이 준결승에서 이9단을 꺾고 올라간 결승전에서는 모두 상대방에게 패배한 것은 이런 요인 때문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한 신예 기사는 유9단의 부진에 대해 최근 기풍이 변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분석했다.

예전에는 기보를 보면 이름을 보지 않고도 유9단의 바둑인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었지만 최근에는 유9단의 바둑이 공격 위주에서 실리 위주의 장기전을 시도한다든지 꽉 죄는 듯 타이트한 착수 대신 보다 유연한 착점을 둔다는 것.

이 신예기사는 “유9단이 최근 다양한 바둑을 시도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며 “최정상급 기사들이 평소 기풍에서 벗어나 다양한 시도를 할 때 일시적으로 성적이 나빠지지만 장기적으로는 바둑이 더욱 좋아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