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명인/수렁에 빠진 문학 살리기

  • 입력 2000년 6월 7일 19시 27분


광주민중항쟁 20주년을 맞은 5월 17일 광주의 밤, ‘새 천년 NHK’라는 수상한 이름의 한 술집에서 전직 노동해방의 시인이 여종업원에게 “샬 위 단스?”를 청했다는, 그리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이 들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번엔 몇몇 유서 깊은 문학출판사들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80년대의 ‘해체’시인 한 사람이 젊은 신인 여성시인에게 말못할 행악을 저질렀다는 이야기가 올려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돌아가신 김현선생은 문학은 길거리에 누워 있는 거지 하나, 혹사당하는 노동자 하나도 현실적으로 구해낼 수 없지만 고통받는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추문으로 만든다고 했다. 나는 그 무렵 문학이 고통받는 노동자를 구원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므로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세상의 추문을 만드는 일이 문학의 일이라는 말의 매력까지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 작가는, 시인은 자신의 문학으로 세상을 끝없이 스캔들로 만드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인간들이다.

그런데, 그런데 만일 문학작품이 아니라 작가나 시인 자신이 세상의 추문의 주인공이 된다면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시인도 인간인 한 이런저런 인간적 약점들을 지닐 수 있고 때로는 그 약점들이 그의 시를 만들어내는 원천인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 그 약점, 그 상처가 아름다움이 됐을 때, 위대함이 됐을 때의 이야기다. 더 이상 세상을 추문으로 만들지 못하는 시인이 자기 스스로가 추문이 됐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한갓 전락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그곳은 곧 시와 시인의 무덤이다.

그러나 문학의 무덤은 이처럼 문학의 안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의 바깥에서도 끊임없이 문학을 농락하고 교살하고 장송하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 문학이 더 이상 우리 시대의 가장 주요한 문화적 생산물이 아니라는 말은 이제 별로 대수로운 말도 아니게 됐다. 영화와 인터넷이 문학으로 향할 대중의 발길을 빼앗고 광고와 상품미학이 문학적 감동을 대체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학은 이제 점차 소멸하는 장르가 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그렇다고 문학이 그 위축상에 걸맞은 마이너리티의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문학이 갖는 전통적인 고급 문화적 ‘아우라’가 이 비문학적 시대에 문학을 하나의 고급상품으로 재탄생시키는 문학은 죽어가는데 문학이 갖는 고급문화적 이미지만 남아 이 비문학의 시대에 문학이 하나의 고급상품으로 재탄생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출판사마다 거액의 계약금과 상금 등으로 돈이 되는 작가를 모시기에 급급하는 동안 잘 팔리면 좋은 문학이라는 비극적 전도가 현실화된다.

여기에 부채질을 하는 것이 언론매체들, 특히 신문이다. 80년대 이래 신문지면의 철저한 상업주의적 재편과 문학의 위기는 같은 맥락에 놓인다. 동서를 막론하고 근대문학의 발전에 신문이 기여한 바는 절대적이다. ‘혈의 누’ ‘무정’ ‘고향’ ‘임꺽정’ 등이 모두 신문연재소설이었거니와 무엇보다 각 신문은 문예면을 고정면으로 배치해 그 자체로서 시 소설 비평 그리고 당대적 쟁점들이 발표되고 전개되는 하나의 장을 형성했다. 오로지 문학이 문화적 생산물의 거의 전부였던 옛날과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하루에 56면을 발행하는 신문이 문학을 가십으로 만들고 작가를 대중스타로 만들고, 문학기사와 기고문을 출판상업주의의 난장판으로 만들 수는 있으면서 진지한 문학담론을 형성해 확산시키고, 가난한 문제작가들을 발굴 소개하며, 이를 통해 동시대에 대한 문학적 진단을 내리고 전망을 모색하는 일에는 오불관언하는 신문이, 수천만원짜리 문학상을 내걸고 의기양양하는 것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문학의 소외이다. 문학은 그저 출판사와 신문사의 장사밑천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느낌, 여기에도 역시 문학의 무덤이 있다.

이 두 개의 무덤 앞에서, 나는 문학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문학에는, ‘적당히’라는 말이 있어서는 안된다. 한걸음씩 물러서다 보면 어느새 모든 것을 잃는다. 모두들 적당히 문학하는 동안 어느새 이처럼 타락은 내면화, 제도화되어 버렸다. 우선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나아가 세계를 향해 다시금 어떤 근본의 감각을 일깨우는 데서 다시 시작하자. 처음부터, 혁명을 하듯. 더 이상 부끄럽고 꺼릴 것도 없지 않은가.

김명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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