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당신들은 실패한 정치인'

  • 입력 2000년 5월 25일 19시 59분


기세 좋게 ‘실패한 관료’를 질책하는 정치인과 그 앞에서 고개를 떨군 경제장관의 모습을 담은 신문사진 한 장이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와 경제간의 함수관계를 상징적으로 설명해 준다.

작년 이맘때 교사들의 집단반발에 부닥쳐 “교육개혁을 벌여만 놓고 마무리하지 못해 아쉽다”는 말을 남기고 교육부장관에서 경질됐던 이해찬 민주당 정책위의장이 재임시절 얼마나 성공한 관료였는지를 굳이 따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정치권이 과연 이렇게 경제장관을 원색적으로 질책할 자격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정치권, 특히 여당은 올해 들어서자마자 총선을 의식해 경제부처에 반개혁적인 주문을 쏟아냈었다. 당시 투신사 부실해소나 은행권 구조조정, 그리고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 고통이 수반되는 화급한 현안들의 처리를 총선 뒤로 미루도록 정부에 요청한 것은 여당이었다.

공기업민영화 계획이 연기됐고 개혁법안들이 국회에서 비토됐던 것도 근로자들의 표를 의식한 정치권의 이기주의 때문이었다. 선거를 의식해 ‘IMF극복’ 치적을 과대하게 선전함으로써 사회전반에 개혁이완현상을 몰고 온 것도 바로 여권의 작품이었다. 또 의석수 확보에 집착한 나머지 일 잘하던 경제장관들을 총선에 내몰았던 것은 누구였나.

그런 여당이 총선 후 한달이 지나자마자 경제실정에 대해 주무부처를 질책하고 나선 것은 오늘의 상황을 초래한 당사자 중의 하나가 정치권이라는 사실을 망각했거나 아니면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경제장관들이 잘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경질이 검토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위기냐 아니냐의 논란으로 국민불안이 증폭되고 있는 작금의 경제상황에 대한 책임은 1차적으로 정책의 집행을 맡은 행정부에 있다. 또 뻔히 잘못될 것을 알면서도 여권의 정치논리를 거부하지 못한 책임도 경제장관들에게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당정회의가 이처럼 떠넘기기식 책임회피 모습을 보이는 것은 요즘같은 경제현실에서 불안감만 가중시키고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행동일 뿐이다.

차제에 정부와 여당은 함께 반성하고, 함께 책임지고 사태를 수습하려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 국민의 마음을 편하게 해줘야 한다. 시장상황과 민심의 추이를 제대로 파악해서 새로운 경제개혁 계획을 만들고 엄격하게 집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도 이 시점에서 당정에 주어진 책무다. 지금은 실패한 정치가 ‘실패한 관료’를 질책하며 책임소재나 따지고 있을 만큼 한가한 때가 아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