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Digital]시군법원 판사 3개월 '특별판사' 조영황씨

  • 입력 2000년 5월 24일 19시 37분


30년간의 변호사 생활을 접고 올해 2월25일 고향인 전남 고흥과 보성의 시군 법원 판사로 부임한 조영황(趙永晃·59)판사.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공소유지 담당 변호사(검찰이 불기소한 사건에 대한 재정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여 진행하는 재판에서 검사 대신 공소유지를 하는 변호사)로 ‘특별검사 1호’를 기록했던 조판사는 이제 시골판사 3개월만에 ‘특별판사’로 불린다.

그가 부임 후 처리한 사건은 200여건. 그 중에서 당사자들이 항소한 사건은 딱 3건. 그것도 당사자가 농협 등 기관인 경우여서 회사방침에 따라 기계적으로 항소한 것이다. 재판받은 사람 거의 전부가 조판사에게 ‘승복’한 셈이다.

5월12일 고흥에 내려가 조판사의 재판을 지켜본 정성광(鄭聖光)변호사는 그 비결을 ‘설득’에서 찾았다. 재판과정에서 당사자들의 말을 충분히 듣고 일일이 설득하기 때문에 판결결과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법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농촌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어렵지 않느냐”고 묻자 조판사는 “시골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에게서 찾기 어려운 순수와 상식이 있다”고 대답한다.

그는 법원 일이 끝나면 옛 초등학교 동창생들을 만나 농사 이야기를 듣고 직접 밭에 나가보기도 한다. 농촌생활을 알기 위해서다. “분쟁이 발생하는 현실을 알고 그 현실에 맞게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는 “시골에서는 법을 내세우면 안된다”고 말한다. 얼마 전에 같은 마을 두 사람이 “빌린 돈을 갚지 않는다” “돈을 빌린 적이 없다”며 조판사를 찾아왔다. 증거는 없었고 주장만 있었다. 증거부족을 이유로 청구기각 판결을 하면 그만이지만 조판사는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판결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인데 패자는 마을에서 부끄러워 더 이상 살 수 없지요. 두 사람이 화해할 때까지 판결을 하지 않고 기다릴 작정입니다.”

그는 또 농번기에는 농민들의 바쁜 농사 일정을 고려해 아예 재판을 하지 않는다. “직무유기 아니냐”는 질문에 “조선시대 문헌에도 농번기에는 재판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대답.

조판사는 옛 시골집에서 노모(81)와 단 둘이 산다. 부인은 서울 집이 처분되는 대로 내려와 합류할 계획. ‘지역유지’ 모임이나 마을 사람들이 베푸는 술자리에는 한 번도 간 일이 없다. 조판사는 5,6년 전 그의 장학사업을 기려 고향 사람들이 공덕비를 세우려 하자 “내 발로 차버리겠다”며 반대했던 일도 있다. ‘아름다운 퇴장’을 했던 조판사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보여주고 있다.

<이수형기자> so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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