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득헌의 스포츠 세상]야구서 배우는 개인주의

  • 입력 2000년 5월 15일 18시 51분


시각이 왜 달라질까. 여건과 환경 때문일까. 아니면 삶의 나이테 탓일까. 나는 야구를 볼 때면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시간과 기다림의 경기’라는 말이 예전에는 그리 곱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마감시간에 임박해 승부가 뒤집어지거나 동점이 돼 연장전에라도 들어가면 그 순간 야구는 내게는 ‘경기’가 아닌 ‘시간과 기다림의 싸움’으로 변했었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지 않고 야구를 볼 수 있게 된 뒤부터는 ‘느긋하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한 선수의 플레이를 기다리는 경기’라는 말을 소중히 여기게 됐다.

‘야구는 외로운 선수를 수용하는 데 가장 어울리고, 또 그들로 장식되는 경기’라는 존 업다이크의 말도 그렇다. 많은 팬의 환호를 받으며 때로는 ‘젊은이의 우상’도 되는 선수들을 ‘왜 외롭다고 하는가’라며 의식적으로 흘려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시원한 타격과 멋진 플레이는 물론 사소한 잘못도 낱낱이 노출되는 일이 선수들을 고독하게 하리라는 생각이 언제부터인가 가슴에 자리했다.

‘시간과 기다림의 경기’ ‘기본적으로 외로운 경기’라는 말은 따지고 보면 야구의 개인주의 성향 때문일 것이다. 그렐라는 19세기 미국에서 형성된 ‘개인적 책임의 정신’이 바로 야구의 정신이라며 미국 이외 지역의 야구를 다소 폄훼했지만 그것이야 어떻든 야구가 단체경기 중 가장 개인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나의 야구 시각도 그런 쪽에 자꾸 무게가 더해진다는 말이다.

사실 야구가 기록경기로도 불리며 또 새로운 기록으로 점철되는 일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그런데 그 기록이 대개는 팀보다는 개인의 것이고, 오래 기억되는 것도 개인의 기록이다. 4일 프로야구 두산의 김동주가 잠실야구장에서 장외홈런을 때려낸 것도 ‘최초’라는 점에서 때마다 거론될 것이다. 구단에서는 그가 때린 볼이 떨어진 곳에 기념보드를 설치한다고 한다.

이 땅에 야구가 들어온 지 95년. 그동안 명승부도 숱하게 많을 것이지만, 개인기록이 명승부 이상으로 대접을 받는 게 야구의 성격인 것이다. 외야 담장이 쳐진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야구장)에서 1928년 이영민이 한국인 최초로 펜스를 넘기는 홈런을 쳤고 공이 떨어진 곳에 한동안 기념푯말이 세워졌었다는 일이며, 1982년 이만수와 이종도가 프로야구 첫 경기에서 최초의 홈런과 만루홈런을 친 것도 늘 새롭게 제기될 것이다.

선수들은 대개 ‘팀 우승 먼저’를 꺼내지만 팀 우승은 결국 ‘개인의 성공’에서 비롯되는 게 야구일 것이다. 나는 ‘단체에서의 개인주의’는 방향만 옳다면 비판받을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야구에서 배운다.

윤득헌<논설위원·체육학박사>dhy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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